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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990.전기

991 [정민] 미쳐야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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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역사. 2004.4.3. 초판 1쇄.

 

 

[1]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세상에 미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큰일이란 없다. 학문도 예술도 사랑도 나를 온전히 잊는 몰두 속에서만 빛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 한 시대를 열광케 한 지적, 예술적 성취 속에는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광기와 열정이 깔려 있다.

저자의 주장. 나머지는 사족.

 

미쳤다고 비웃던 자들, 전전긍긍하면서 아무 하는 일 없으면서도 스스로 정상인이라고 만족하는 자들의 비웃음은 한줌 값어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라캉이 깨달았 듯, 인간이란 어차피 타자의 욕망을 살아가는 존재.

 

홀로 걸어가는 정신이란 남들이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출세에 보탬이 되든 말든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정신이다.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이것저것 따지기만 해서는 전문의 기예, 즉 어느 한 분야의 특출한 전문가가 될 수 없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추호의 의심없이 제 생의 전 질량을 바쳐 주인 되는 삶을 살았던 옛사람들의 내면 풍경이 나는 그립다”고 썼다.

       기계문명과 정보화문명이 사람 할 일을 다 해낸다는데, 먹고 사는 일은 어찌 이리 고된지.

 

 

[2]

 

좋게 느껴지는 것과 진실인 것은 분명히 다르며, 구분되어야 한다.

진리니 진실이니 하는 것들을 대하는 태도가 분명 변하고 있다. 진리 탐구의 대명사인 수학과 과학조차 현대로 접어들면서 ‘진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는 점은 의미가 크다.

 

 

[3]

 

능력 있는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 공정한 룰이 지켜지는 시스템을 사람들은 말한다. 지극히 당연한 이 말이 자꾸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세상이 그처럼 공정하지도 않고, 능력 있는 사람이 제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도 않기 때문이다. 바른길을 가는 사람들이 바보라고 놀림당하고, 부족한 것들이 작당해서 능력 갖춘 사람을 왕따시키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늘상 있는 일이다.

공정을 앞세운 사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딱 거기까지. 대중은 공정이라는 가치에 대표성만 부여할 뿐 일상이 바뀌는 것은 그리 바라지 않는 분위기다.

 

 

[4]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 탓에 주변 사람과 별 교통이 없는 폐쇄적인 상황 속에서 공부하였고, 모르는 것이 있어도 물어볼 스승조차 없는 답답함이 더하여, 마침내 히스테리 발작 증세로까지 나타났던 모양이다.

정조 시대 천재 천문학자인 김영에 대한 이야기. 무한의 신비에 도전하다가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린 게오르크 칸토어의 이야기와 많이 닮았다. 정신노동의 극한점이란.

 

김영이 관상감에 들어간 뒤 일이 있을 때는 인정받아 중히 여김을 받았고, 일이 끝나면 그 능력을 질투하여 왁자하게 떼거리로 일어나 그를 괴롭혔다. 혹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면전에다 욕을 하고 주먹으로 때리기까지 하였다. 김영의 부고를 들은 서유본이 그 집에 사람을 보냈을 때, 원고가 가득 담겨 있던 책 상자는 관상감 생도가 이미 훔쳐가 버린 뒤였다. 이미 그의 연구를 도적질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던 손길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살았을 때 면전에서 욕하고, 주먹을 휘두르던 자들이었다. 결국 김영의 필생의 저작들은 가져간댔자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할 자들의 손에 들어가 오유烏有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영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가해자들은 다들 배운놈들이요, 전문가들이다. 김영이 해코지를 당한 곳은 관상감인데, 전문직인 관계로, 김영이 마흔한 살의 나이에 정조의 특명에 따라 특례로 발탁되기 전까지는, 과거시험을 통하지 않은 전례가 없었던 곳이다. 그런 놈들이 모욕과 폭력과 도적질을 한 것이다. 그들이 한심하다기보다는, 사람 형상을 한 것들의 수준이 사실 그 모양일 뿐.

       오유烏有는 ‘어찌 있겠느냐’는 뜻으로, 있던 사물이 없게 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세상은 재주 있는 자를 결코 사랑하지 않는다. 능력 있는 사람이 손가락질 당하는 세상, 모자란 것들이 작당을 지어 욕을 하고 주먹질을 해대는 사회, 그러고는 슬쩍 남의 것을 훔쳐다가 제 것인 양 속이는 세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5]

 

대저 사람은 스스로를 가벼이 여기는 데서 뜻이 꺾이고, 이리 저리 왔다갔다하느라 학업을 성취하지 못하며, 마구잡이로 얻으려는 데서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만다.

한번 사는 인생 꼭 학업을 성취하고 이름을 드높이는 게 전부겠냐먀는.

 

지금도 세상을 놀래키는 천재는 많다. 하지만 기웃대지 않고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성실한 둔재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한때 반짝하는 재주꾼들은 있어도 꾸준히 끝까지 가는 노력가는 만나보기 힘들다. 세상이 갈수록 경박해지는 이유다.

왜 없겠나. 경박한 자들이 더 나댈 뿐.

 

 

[6]

 

날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주체를 세우는 일이다. 주체를 세우는 일은 식견을 갖추고 통찰력을 지녀야만 가능하다. 남들 하는 대로 하고 가자는 대로 이리저리 몰려다니기만 한대서야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김상태는 <도올 김용옥 비판>에서 입체적인 학문 능력이 없으면 자료만 찾게 되고 그럴수록 학문적으로 무능해진다고 쓴소리를 했다. 지知의 상태란 자료가 많다고 해서 저절로 나아지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덕무의 편지글에 보면 “옛날에는 문을 닫고 앉아 글을 읽어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었지요”라는 구절이 있다. 정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오늘의 우리들이다. 인터넷 시대에 세계의 정보를 책상 위에서 만나보면서도 천하의 일은커녕 제 자신에 대해서조차 알 수가 없다. 정보의 바다는 오히려 우리를 더 혼란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할 뿐이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나는 없고 정보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소유한 정보의 양이 늘어갈수록 내면의 공허는 커져만 간다. 주체의 확립이 없는 정보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공부의 출발점이 ‘자기의 머리로 생각하기’인 데야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앞뒤로 통찰이 있고, 연결이 있는 것이다. 공교육이 암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7]

 

‘이건 비밀인데’ 하면서 하는 말은 대개 그 말까지 같이 전해진다. 말해놓고 당부하는 것은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못 믿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그런 말을 하려거든 아예 하지를 말아야 한다.

이 단순한 게, 참 쉽잖다.

 

 

[8]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귀한 것은 성실함이다. 어떤 것도 속여서는 안 된다. 하늘을 속이는 것이 가장 나쁘다. 어버이를 속이거나, 이웃을 속이거나, 장사꾼이 동료를 속이는 것 모두 죄에 빠지는 것이다. 한 가지만은 속여도 괜찮으니, 바로 자기 입이다. 모름지기 거친 음식으로 잠시 지나가는 것, 이것이 좋은 방법이다. 매일 밥 한 끼를 먹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갖도록 해라. 정력과 지혜를 쥐어짜 더러운 뒷간을 위해 충성을 바칠 것 없다.

문득 떠오르는 일화.

       송동춘이란 양반이 열 살 되던 무렵, 집안 어른이 그를 불러 묻기를,

       “감히 속이지 못하고, 차마 속이지 못하고, 능히 속이지 못하는 것. 이 셋은 어떻게 다른가?”

       어린 동춘이 답하기를, 위엄이 있는 사람은 감히 속이지 못하니 이는 속이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요, 어진 사람은 차마 속이지 못하니 이는 마음으로부터 그 사람에게 감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능히 속이지 못하니 이는 그의 밝은 지혜에 눌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셋 중 누가 가장 나은고?”

       “차마 속이지 못하는 사람이 제일이옵니다.”

       “어찌 그러한가?”

       “차마 속이지 못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덕으로 인해 속일 마음 자체가 사라져 속일 수 없으니 가장 으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능히 속이지 못하는 사람은 지혜로와서 다른 사람들이 그를 능히 속일 수 없으니 두 번째에 해당하고, 감히 속이지 못하는 사람은 그 지위나 위엄으로 말미암아 속이지 못할 뿐이니 맨 하위에 해당합니다.”

 

 

[9]

 

글쓰기는 지식인의 기초 교양이다. 제 품은 생각을 오해 없이 충분히 전달할 수 있으려면 문필의 힘이 꼭 필요하다. 지금도 그렇고 예전에도 그랬다. 글쓰기는 생각의 힘에서 나온다. 머릿속에 든 것 없이 좋은 글, 알찬 생각이 나올 수 없다. 출력을 하려면 입력이 있어야 한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든든한 바탕 공부를 갖추어야 한다. 든 것도 없이 꺼내려고만 들면 얼마 못 가 밑천이 바닥나고 만다. 바싹 마른 우물에서는 물이 솟지 않는다.

공교육이란 것이 이 당연한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혹은 그저 가르칠 뿐 애쓰지 않거나.

 

 

[10]

 

글로 쓰여지지 않고, 문자로 고정되지 않은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천하 사물은 명문 아닌 것이 없다.

참 대단한 경지.

 

 

[11]

 

어린 시절 노닐던 곳을 어른이 되어 오는 것이 한 가지 즐거움이고, 곤궁할 때 지나갔던 곳을 뜻을 얻어 이르는 것이 한 가지 즐거움이며, 혼자서 갔던 곳을 좋은 벗을 이끌고 이르니 또 한 가지 즐거움이다.

마지막 구절은 이제는 민폐.

 

 

[12]

 

옛사람은 ‘젊었을 적 한가로움이라야 한가로움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다 늙어 한가로운 것이야 할 일이 없는 것이지 한가로움이라 말할 것이 못 된다. 숨가쁜 일상 속에서 짬 내어 누리는 한가로움, 일부러 애써서 찾아내는 한가로움이라야 그 맛이 달고 고맙다.

분명 한가로움이라 부를 만한데, 먹을 거리들이 그렇듯, 옛 맛이 통 안 난다.

       장판 깔린 마당 평상의 한가로움은 이제는 기억 너머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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