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2009.9.4 초판 1쇄.
[1]
예전에는 다들 그런 실험이 지독하게 전복적이라고 생각했다면 이제 그냥 지독하게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디지털 시대의 친환경적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겠다는 계획에 대한 사회적 시각의 변화를 설명한 대목. 사실 주제와 무관하게 다양한 시각 - 전복적, 혁신적, 모험적, 기타 등등 - 이 수지타산적 관점으로 일원화되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인간의 우둔함 혹은 근시안적 시각을 입증하기는 식은 죽 먹기.
[2]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우리 대다수가 굳게 견지하는 믿음이 있다. 이전 문명과는 달리 만년설 따위, 지하드 전사 한두 명이나 석유공학자들, 더러운 세균 따위가 아무리 방해를 해도 우리는 결국 슈퍼볼 경기를 관람하고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GPS 내비게이션 안내를 따라 드라이브하는 파티 같은 삶을 유지할 길을 끝내 찾아내고 말 거라는 믿음 말이다. 이건 우리가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의 사회적 등가물이라 하겠다.
냄비 속 개구리가 따로 있나.
[3]
뿌리째 뽑혀나간 사시나무 등걸들이 식사시간에 늦은 악어떼들처럼 하류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표현 참 찰지네.
[4]
녹색의 삶을 산다는 건 전부 아니면 전무의 문제가 아니었다.
“all or nothing”을 흔히 “전부 아니면 전무”라 번역한다. 나름 두운을 맞췄으나 제대로 된 번역인지도 의문인데다가 일단 어감이 도무지 신통찮다.
all or nothing에서 all은 ‘몽땅’, nothing은 ‘빈손’이라는 뉘앙스인데, 몽땅과 빈손을 이어붙이면 대단히 어색하다는 게 고민의 시작.
all or nothing과 결이 같은 우리말 표현을 찾는다면 ‘도 아니면 모’. 다만 두 표현은 결이 사뭇 다르다. all or nothing이 결과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반면, 도 아니면 모는 시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사뭇 크다. all과 모, nothing과 도가 뜻하는 정도의 차이 역시 무시하기 어렵고.
이런 연유로 직역이라 할 만한 ‘전부 아니면 전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듯싶은데 아무것도 못 건졌다는 느낌의 nothing과 아무것도 없다는 뜻인 전무가 풍기는 뉘앙스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한윤형이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에 쓴 “대박 아니면 쪽박”도 하나의 대안이겠으나, 이 표현은 점잖은 문장에 들이기는 아무래도 쉽잖다는 아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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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 게파트는 미국이 대의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의 대의를 반영하는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국민은 ‘선거일’에만 나라의 주인이라는 게 좀 더 냉정한 분석. 선출된 공무원이 뽑아준 사람 말고 다음 선거에서 저를 천거해 줄 자의 눈치만 살핀다는 점에서 선거일이라고 해서 국민을 주인이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은 없잖겠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