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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070.저널리즘

070 [손석춘] 신문 읽기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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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마고원. 1997.02.13 초판 1쇄. 2006.03.02 재판 8쇄

 

 

[1]

 

이 책의 목적은 간단명쾌하다. 올바른 신문 읽기란 곧 ‘기사 읽기’를 넘어서 ‘편집 보기’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다.

‘편집 보기’가 중요한 이유는 단 하나:

 

독자든 시청자든 편집을 통해 걸러진 내용을 제대로 분별해 내지 않으면, 한 편집자의 가치판단에다 자신의 머리를 고스란히 내맡기는 꼴이 되고 만다.

기자 출신으로 대학에서 미디어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는 저자는 신문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이야기들이 대개 이런 모습을 한다.

       편집하는 쪽의 입장을 담은 책은 고경태의 <유혹하는 에디터>.

 

 

[2]

 

기사의 서두나 말미에 이름을 밝히고 있는 취재기자가 기사 제목을 정한 뒤에 기사를 써나간 것이 아니다. 신문은 제목을 정한 뒤 기사를 쓰는 것이 아니고 기사를 쓴 기자와 제목을 쓴 기자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이 간단한 상식이 갖는 의미는 그러나 결코 간단치 않다.

알기 전까지는 결코 보이지 않는 세상.

 

 

[3]

 

신문 지면을 펴보기 바란다. 독자들은 빈자리가 전혀 없음을 새삼스레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기사들을 신문 지면에 여백 한 곳 없이 배열해야 할 누군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신문은 ‘사실의 조합’이라기보다는 이렇듯 신문을 편집한 ‘누군가의 생각’이라는 말.

 

 

[4]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겨례의 대다수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를 ‘세계’로 파악했던…

이 땅의 적잖은 문제들이 여기에 닿아있다.

       문득 ‘겨레’란 말을 안 쓴 지 오래구나 싶다. ‘시나브로’ 같은 어딘가 억지스러운 듯한 낱말 말고, 일상어의 지위를 가진 우리말부터 자주 쓰고 볼 일이다.

 

 

[5]

 

1980년 이른바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과 언론인 대량 해직 때 이를 추진했던 신군부 실세 가운데 한 사람은 언론사 포기 각서를 받기 위해 내로라하는 신문사 사장들을 보안사령부로 부르면서 내심 몹시 긴장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우려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기우였다는 것을 곧 확인할 수 있었단다. 그러면서 그는 “썩은 호박에 칼 들어가듯 쑥쑥 먹혀들었다”고 회고했다.

썩은 호박에 칼 들어간다는 비유가 기가 막히다. 돈에 목숨 바친 먹물들의 한계는 정확히 여기까지.

 

 

[6]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은 사보 70주년 대담에서 “나는 신문이 나오면 먼저 아랫도리부터 본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광고주의 영향력을 설명한 대목. 평소 이미지만큼이나 저급한 언어를 구사한다. 언어는 화자의 삶을 또렷이 대변한다.

 

 

[7]

 

권위지를 표방하는 세계적 언론들이 대부분 1면에 광고를 싣지 않거나 적게 싣고 있는 것도 우리 신문들과 비교해볼 만한 대목이다. 사실 언제나 신문 1면의 4분의 1을 광고로 채우면서도 정론지를 자처하는 신문들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다.

상대화를 통해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진실들이 있다. 그런 진실들이 대개 더 매섭다.

 

 

[8]

 

인터넷은 사람들에게서 좋은 정보와 쓰레기를 구별하는 능력을 빼앗아가고 있다.

화자는 움베르토 에코.

       글쎄. 이 세상 모든 가치판단은 주관적 아니겠나. 편집된 세상을 보느니 ‘정보와 쓰레기’를 섞어 보는 게 차라리 낫다. 과거에는 이런 식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따름.

 

 

[9]

 

초판이 출간된 지 20년. ICT의 선사시대에 쓰였다. 저자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서비스는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신문의 체감 영향력은 예전만 못하고, 앞으로는 더 미미해질 분위기다. 또다른 ‘편집’이 신문의 자리를 꿰차기는 하겠으나 편집의 독점 시대가 저문다는 것은 어떻든 잘 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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