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 2012.3.5 초판 1쇄.
[1]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즉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진 시대였던 것이다. 냉전 역시 이러한 면역학적 도식을 따른다. 면역학적 행동의 본질은 공격과 방어이다.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전 사회를 장악한 이러한 면역학적 장치의 본질 속에는 어떤 맹목성이 있다.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면역 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자체이다. 아무런 적대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타자도, 아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외래종이란 그 존재만으로도 가끔은 위험한 것. 면역학적 시대라는 대단한 수사 이전에 ‘지구촌’이라는 낱말이 묘사하던 세상. 결말은 아직도 오리무중.
[2]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흥미로운 표현. 동의까지는 아니고.
[3]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수전 케인이 <콰이어트>에서 이 주제를 좀 더 평이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4]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학교는 지식의 전수와 함께 태도 또한 학습시킨다. 모든 문제에 답이 있고, 누구보다 빨리 답하는 것이 옳다는 강박을 세뇌시킨다. 기업은 그런 능력에 기꺼이 지불하고, 이로써 천박함은 거듭 강화된다.
[5]
자아가 줄어들면 존재의 중력은 자아에서 세계로 옮겨간다.
뻔한 얘기를 그럴듯한 낱말로 엮어냈다. 비유를 전문용어인 척 하는 건 바람직한 태도가 못 된다. 담백하고 쉬운 문장으로도 어렵잖게 전할 수 있는 메시지. 대개는 고개를 끄덕이겠으나, 앨런 소칼과 나는 생각이 다르다.
[6]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가 거듭 떠오르는 책. 김정운은 <에디톨로지>에서 <피로사회>를 긍정적으로 언급한다. 독일에서 공부한 탓에 독일어 문체에 익숙하다는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런 김정운도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에서는 독일어가 낳은 철학에 쓴소리를 한다: “사실 독어처럼 말장난하기 쉬운 언어는 없다. 아무렇게나 붙여도 다 말이 되기 때문이다. 독일 철학이 어려운 이유는 이 같은 독일어 특유의 조합어 때문이다. 헤겔, 칸트의 철학이 어렵고 난해한 이유가 내 무지 때문이 아니라는 거다. 그 나라 말장난이기 때문에 어려운 거다. 그 나라의 철학 수준이 높기 때문이라는 막연한 ‘주변부 열등감’을 이제 버릴 때가 됐다.”
<피로사회>는 독일어로 쓰고 나서 한국어로 번역했다. 한병철이 한국어로 먼저 썼다면, 문장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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