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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130.철학체계

138 [앨런 소칼] 지적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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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신문사. 2014.1.10 초판 1쇄.

 

 

[1]

 

원제는 <Fashionable Nonsense: Postmodern Intellectuals’ Abuse of Science>. 뉴욕대학교 물리학 교수인 앨런 소칼의 패러디 논문 “경계의 침범: 양자중력의 변형해석학을 위하여”는 1996년에 “소셜 텍스트”에 게재됐고, 원서의 카피라이트는 1998년, 우리말 번역서는 2000년이 초판.

 

 

[2]

 

개인적으로 워낙 낯익은 책인데, 통독을 하지는 않았다. 일단 지은이들이 ‘헛소리’를 입증할 목적으로 인용한 글들이 워낙 난해한 헛소리인데다가, 애써 읽어봤자 결국 헛소리를 공들여 읽게 되는 탓이다. 흔히 거짓 권위를 폭로하는 점잖은 저자들이 그렇듯이, 지은이들 역시 인용된 대목이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워낙 수고롭게 논증하고 있는데 그 역시 한참을 읽고 나서 얻게 되는 결론이래야 ‘인용된 대목은 헛소리인 게 확실합니다’일 수밖에 없는 마당에, 나로서는 인용된 헛소리들을 그렇게까지 꼼꼼하게 검증할 생각이나 의지는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헛소리 몇 개는 나름 꼼꼼하게 읽었는데, 책의 초반에 등장하는 자크 라캉의 글은 첫눈에도 ‘이 무슨 헛소리(좀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개소리’)인가’라는 생각이, 다행스럽게도, 절로 든다.

 

 

[3]

 

그들이 난해하게 늘어놓는 헛소리들을 덜고 나면 간혹 유의미한 메시지가 숨어 있기도 한데, 예를 들어, 자크 라캉의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주장 같은 경우는, 참으로 진리.

 

 

[4]

 

최진기가 <인문의 바다에 빠져라>에서 언급했던 보드리야르도 헛소리의 주체로 등장한다. 최진기의 책은 도무지 연이 닿질 않는데, 이를 계기 삼아 다시 한 번 들춰봐야 하려나…

 

 

[5]

 

우리는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개념을 이식하는 데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논증 없이 이식하는 데 반대할 뿐이다.

헛소리의 일반적 구조 체계를 밝힌 대목. 저자인 앨런 소칼과 장 브리크몽이 물리학을 공통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주로 문과적 저자들이 이과쪽 용어를 근본 없이 휘두르는 대목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저자 소개란의 앨런 소칼은 꽤나 대단한 이력을 보유하고 있는데, 통계역학과 조합론을 전공한 물리학자인 그는 하버드대학교에서 문학으로 학사를,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니카라과 국립 자치대학교에서 3년 동안 수학을 가르쳤단다. 이런 눈으로 바라봤으니 어지간한 헛소리들은 금방 드러났을 듯.

 

 

[6]

 

우리는 특정한 텍스트들이 유달리 난해한 것은 그 안에 심오한 사상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신화를 “해체”하려고 한다. 만일 어떤 텍스트가 난해하게 다가온다면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그 텍스트가 아무것도 뜻하는 바가 없다고 하는 너무나 자명한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보여줄 것이다.

혹은 그럴듯한 사상을 담기는 했으나 정작 문장 하나 제대로 구성할 깜냥이 못 되었거나, 그 신통찮은 문장력을 보완해 줄 실력 있는 편집인을 단 한 명도 찾지를 못했거나.

       해서, <검사내전>의 한 구절에서, 잘못은 김웅이 아니라 프로이트 쪽에 있다.

 

(p.69)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오류의 중요한 본질적 요소는 오류의 형식이나 수단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려는 의도, 즉 여러 가지 형태를 통해 그것을 관철하려는 의도이다.” 어려운 말인데, 내 수준에서는 사람들이 오류에 빠지는 것은 궁극적으로 원하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 김웅, <검사내전>

       프로이트와 김웅의 문장 중에 김웅의 문장 쪽이 당연히 읽고 이해하기 쉽고, 평범한 지성이면 누구나 의문을 품을 수 있듯, 말마따나 두 문장의 뜻이 오롯이 같다면 김웅이 프로이트의 암호문을 해독하러 나설 게 아니라 프로이트가 김웅처럼 말했어야 옳다.

 

 

[7]

 

어떤 주장의 지적 가치는 그 주장의 내용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누가 그 말을 하는 것인지에 의해서, 하물며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떤 학위를 갖고 있는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 대목은 “부당권위에 호소하는 오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부당권위에 호소하는 오류에 따르면 저명한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이 미래적 종교로 불교를 지지한다고 해서 그 말 역시 자동적인 권위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인용한 대목에 따르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말의 지적 가치에 따라서는 불교를 지지한 아인슈타인의 주장 역시 그 어떤 저명한 불교학자의 논증만큼이나 권위를 가질 수도 있다.

 

 

[8]

 

대체로, 지적으로 탄탄한 내실을 갖추고 있는 분야일수록 자격증보다는 알맹이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문화가, 당연히 옳다.

 

 

[9]

 

전문어가 들어간 문장 앞에 “알다시피”라는 표현을 덧붙이는 것이야말로 지적 테러리즘의 전형적 표본이다.

지적 테러리스트가 될 생각이 추호도 없는 나 역시 가끔 ‘알다시피’라는 표현을 부득이 쓸 때가 있는 입장이다 보니, ‘알다시피’를 입에 올리는 심정에 대해 일부나마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는데, 굳이 ‘알다시피’라는 군더더기를 붙이는 것은, 이미 서로 뻔히 알고 있기로 되어 마땅한 이야기를, 혹시라도 한 쪽이 잊었거나 놓쳤을 수도 있어서, 그저 돌다리를 두드린다는 심정으로, 서로 대단히 바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새겨들을 만한 새로운 메시지 없이, 혹여 있을 오해나 착오의 방지만을 위해, 주접스레 늘어놓을 작정이니, 뭐 저리 뻔한 얘기를 하고 있나 눈총을 주거나, 다 아는 얘기를 길게도 하네라는 메시지를 담은 하품을 애써 동원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라는 일종의 선언.

 

 

[10]

 

사실과 검증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모든 것은 주관적 이해 관계나 관점으로 수렴된다는 생각이 득세하는 현실은 우리 시대에 팽배한 반지성주의의 폐해를 역겹고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소위 전문가라는 자들도 어찌 감당할 수 없을 만치 세상이 바뀌어나가는 것도 큰 원인. 그렇다고 세상더러 꼼짝 말고 그대로 있으랄 수도 없는 일이고.

 

 

[11]

 

학제간 연구는 이제 대세로 자리잡은 듯하다. 전문성의 퇴색이 지적 엄밀성의 기준을 저하시킬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 사고 영역이 다른 사고 영역에 던질 수 있는 통찰은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학제간 상호소통을 막으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진정한 대화를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전 조건들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통섭이니 융합이니가 그럴 듯한 유행이 된 지는 이미 오래. 청년들의 창업을 강권하는 이들이 저들은 따뜻한 아랫목을 찾아들 듯이 융합을 들고 나서는 이가 저 스스로는 그럴 의사나 의지가 딱히 없다는 점은 눈꼴 사납다. 저는 없는 배짱을 남에게 요구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12]

 

난해하다고 해서 반드시 심오한 것은 아니다.

난해와 심오가 상호 필요충분적 관계가 아니라는 거야 지당하신 말씀. 다만, 이를 빌미 삼아 심오해도 평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의문. 파인만이나 대니얼 데닛처럼 저자 역시 “그 어려움이 진정한 어려움일 때는, 그 이론이 어떤 현상을 분석하는지, 그 이론에서 도출되는 중요한 결과가 무엇인지, 그 이론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논거가 무엇인지를 간단한 용어들로 기초적 수준에서 설명하는 것이 대체로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글쎄, 정말 그럴까.

 

 

[13]

 

우리가 본 무수히 많은 애매모호한 글들은 두 가지 유형으로 집약된다. 하나는 맞지만 뻔한 주장이고, 또 하나는 과격하지만 뻔히 틀린 주장이다.
많은 경우 이 모호성은 의도된 결과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실제로 지적 전투에서는 모호성을 앞세우는 것이 대단히 유리하다. 과격한 해석은 경험이 부족한 청중이나 독자를 사로잡는 데 안성맞춤이다. 또 이런 해석의 허무맹랑함이 폭로된다 해도 저자는 오해받았다는 주장으로 자신을 변호하면서 말썽의 소지가 없는 해석으로 언제든지 물러설 수 있다.

의도된 모호성이 어쩌고 지적 전투가 저쩌고 해도, 결국은 다들 밥벌이의 문제. 누가 그랬던가. 사안이 이해하기 어려울 때는 돈이라는 요소를 덧대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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