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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300.사회과학

304 [김웅] 검사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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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키. 2018.1.19 초판 1쇄. 2018.1.26 초판 2쇄.

 

 

[1]

 

(p.18) 사기 공화국이다. 사회 전체에 세속적인 욕망이 창세기 바다처럼 들끓고 있다.

검사의 일상을 책으로 쓰리라 작정한 저자의 첫 문장.

       현장의 음성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p.69) 제발 범죄 피해를 당하지 마시라. 피해자도 헌법상 기본권이 보장된 우리나라 국민이지만 실제로는 2등 국민이다.

현직 검사가 이런 문장을 활자화하는 사회가 정상이기는 어렵다. 세속적 욕망이 판치는 정치 권력이 이 땅 모든 문제의 근원.

 

 

[2]

 

(p.4) 그 선배는 소위 ‘귀족 검사들’과는 거리가 먼 형사부 검사였다.
       어느 날엔가 나는 무척 화가 나 있었다. 내가 검찰에 들어온 뒤 이 조직은 늘 추문과 사고에 휩싸였다. 그때마다 뼈를 깎는 각오로 일신하겠다는 발표를 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더 이상 깎을 뼈도 없는 연체동물이 된 것 같았다. 그런 상황을 접할 때마다 늘 죄인처럼 지냈지만, 추문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대부분의 검사들이 왜 싸잡아서 욕을 먹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 억울함에 젖어 있단 당시 그 선배를 찾아갔다. 내 화를 가장 적절하게 맞장구쳐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다짜고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분통 터지지 않느냐고 묻자 선배는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은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여객선의 작은 나사못이라는 것이었다. 나사못의 임무는 배가 어디로 가는지를 걱정하기보다 자신이 맡은 철판을 꼭 물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게 대한민국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벤츠 자동차를 살 때는 삼각별 엠블럼을 보고 사지만 실상 벤츠를 벤츠답게 해주는 것은 수천 개의 보이지 않는 나사못들 덕분이라고 했다.

일견 그럴 듯하지만 복잡다단한 이야기.

       하나. 온 마을 사람들이 동구밖에 현수막을 내 걸며 응웠했던 꼬마 신동들은 대처로 나가서는 대개 나사못의 삶을 산다. 동네를 다시 찾은 나사못은 금의환향의 환대에 잠시 우쭐할 수는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저 나사못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온 동네 사람들에게 명명백백 고지하는 게 바른 길이다.

       둘. 선배의 생각을 실천에 옮긴 역사적인 인물은 아돌프 아이히만. 여객선의 항로에는 신경 끄고 나사못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아이히만은 그 책임을 지고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셋. 주위의 검사들이, 특히 상사들이, 타인을 처벌하는 일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행동의 옳고 그름에는 눈 감는 현실을 견딜 수 없어 검찰을 떠났다는 이연주는 ‘추문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대부분의 검사들이 왜 싸잡아서 욕을 먹는지 의구심이 들었다’는 김웅의 말을 두고 ‘침묵한 죄와 행동하지 않은 죄를 각성하지 못하는 가벼운 시각’이라 이야기한다. 모름지기,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3]

 

(p.49) 곤경에 처했을 때 가장 쉽고 효과적인 해결책은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모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함은 터무니없을수록 효과적이다.

빌어먹을 진실.

 

 

[4]

 

(p.49) 정치와 권력의 힘은 성층권에서 행사되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비열하고 무서운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잘 봐 준대야 삼천 년 안팎을 묵은 인간들의 무리는 어떤 종자가 첫 단추를 뀄는지 망조를 향해 제대로 돌진 중이다.

       정치와 권력의 힘. 지랄하네.

 

 

[5]

 

(p.69)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오류의 중요한 본질적 요소는 오류의 형식이나 수단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려는 의도, 즉 여러 가지 형태를 통해 그것을 관철하려는 의도이다.” 어려운 말인데, 내 수준에서는 사람들이 오류에 빠지는 것은 궁극적으로 원하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프로이트와 저자의 문장 중에 저자의 문장 쪽이 당연히 읽고 이해하기 쉽다. 저자 말마따나 두 문장이 온전히 같은 뜻이라면 저자가 프로이트의 암호문을 해독하러 나설 게 아니라 프로이트가 저자처럼 말했어야 옳다.

       독일인들이 일상적 언어 습관이 프로이트의 문장을 닮았다면, 그저 그 민족에 문제가 있는 것.

 

 

[6]

 

(p.224) 법은 물이 가는 것처럼 순리적이어야 한다는 허무맹랑한 말로 끝을 맺는 명사들의 특강을 듣는 것은 고역이다.
       법이란 말의 어원은 물이 가는 것이라는 뜻과 전혀 관련이 없다. 원래 법이란 더러운 것을 싫어하는 상상 속의 동물인 ‘해태’가 죄 지은 사람 쪽으로 ‘가서’ 그 사람을 물어 죽인다는 뜻이다. 성질이 더러워서인지 해태는 그 글자가 너무 복잡했기 때문에 결국 물 수 변으로 줄인 것이다. 물이 아니라 해태가 가는 것처럼 우연적이고 응보적이며 냉정한 것이 법이라는 뜻이다. 그걸 두고 ‘물이 가는 것처럼 순리대로 따르라는 것이 법’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신림사거리를 줄인 ‘신사리’를 두고 신사가 많은 곳이라고 설명하는 것과 같다.

알면서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작자가 제일 나쁜 놈이다.

 

 

[7]

 

성전 읽기와 공부를 중요시하던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달리 카톨릭은 일반인들이 성서 읽는 것을 두려워하고 이단시했다.
       발도파의 팽창에 두려움을 느낀 로마 교회는 평신도의 성서 읽기를 금지시켰고, 심지어 종교재판에서 성서를 소유하거나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단 판정을 내리기도 했다.

지금에야 카톨릭이 기독교에 비해 점잔을 떠는 모양새지만, 유일신을 앞세운 종교라는 것들은 애당초 광기를 숙주 삼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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