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사상사. 2011.7.22 초판 1쇄.
[1]
우리 사회는 더 성숙해야 한다. 성숙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잘못이 있다면 처벌과 비난까지도 감수하고 반성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고, 만약 부당한 혐의와 비난을 받고 있다면 그에 맞서서 싸우는 용기 또한 필요로 한다.
개인 대 네트워크의 싸움. 이게 문제다. 한때 ‘나 하나 만이라도’ 같은 슬로건이 공감을 얻던 시절이 있었는데, 딱 거기까지. 그 뒤를 이은 ‘내 탓이오’는 공염불에 가까웠던 듯.
[2]
‘나의 진보적 가치와 아이의 행복이 충돌할 때 결국 아이를 위해 양보하게 되더라’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이 지점이 ‘말 뿐인지’ 혹은 ‘삶인지’의 기준점일 것”이라 썼다.
2019년 가을의 문턱, 아이의 행복을 위해 진보적 가치를 양보했던 조국은 그 대가을 혹독히 치르는 중이다.
식민과 전쟁의 기억으로 결핍이라면 치를 떠는 세대에게 무소유를 기대한다면 순진함이 과한 것. 그 세대는 떠나고 어느덧 그들이 치열하게 길러낸 자식 세대들이 은퇴를 목전에 두고 있으나, 그들의 자식 세대가 결핍을 대하는 자세 역시 그리 다르지 않다.
개인과 공동체 중, 아직은 분명 개인 쪽이 더 무겁다. 여전히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지구가 소멸하려면 아직 오십억 년을 기다려야 한다. 물론 백만 년 정도면 이천 년 남짓한 세월을 난리법석 떨던 인간들은 전혀 다른 모습의 생명체가 될 운명이기는 하나.
지겹다.
[3]
단지 승패에 따라 영웅도 되고 죄인도 되는 그런 문법에선 진정성을 찾기 어렵다.
정치판이 딱 이렇게 돌아간다. 사법부와 행정부도 적당히 장단을 맞추고. 이번 세대가 이 생태계를 고쳐낼 수 있을지. 다음 세대는 오히려 쉽잖을 듯싶어, 못내 씁쓸하다.
[4]
우리는 어떤 일에서건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얻었을 때 ‘우리가 좀 더 잘할 수 없었을까’라고 성찰하기보다는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남 탓’과 ‘원망’의 담론에 익숙하다.
심리학적 관점에서는 당연한 이야기. 어떤 심리 기제는 착시와 같아서, 그릇된 줄 안다고 해서 바로잡을 수 있는 건 아니다.
[5]
끊임없이 ‘더 나쁜 쪽’과 비교함으로써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
바람직한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더 나쁜 쪽’과의 비교를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자세가 바람직할 리 없다. 그러나 대개 비판은 쉽고 대안은 어렵다. 해서, ‘그래서 대안이 뭔데?’는 발전적인 논의보다는 논쟁의 수세에서 벗어나려는, 혹은 사색의 얄팍함을 가리려는, 간사한 술책일 때가 훨씬 잦다.
[6]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은 진보주의자들이 믿는 흔한 속설이다. 만약 바깥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실들 모두를 대중의 눈앞에 보여준다면, 합리적인 사람들은 모두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헛된 희망이다. 인간의 두뇌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프레임이다. 한 번 자리 잡은 프레임은 웬만해서는 내쫓기 힘들다.
결이 다른 두 가지 문장을 이어붙인 모양새. 앞은 앞대로 옳고, 뒤는 뒤대로 옳다. 앞은 앞대로 문제고, 뒤는 뒤대로 문제다.
[7]
엘리트 계급이 자기들의 이익을 다수의 이익인 양 포장하는 건 인류 역사 이래로 계속돼온 전통이다.
‘엘리트 계급’이라는 낱말 선택은, 이 맥락에서는, 묘한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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