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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나무. 2006.12.15 초판 1쇄.
[1]
송대 최고의 화가 미불은 역대 명화를 임모하는 것이 취미였다. 명망 있는 화가가 왜 남의 그림을 모사했을까. 고금 제일의 감식안을 자랑했던 그는 수장가들이 자신이 가진 작품을 얼마나 똑바로 알고 있는지 시험해보고자 했다는 것이다. 남의 소장품 하나를 빌려 미불이 이를 베낀다. 그 다음 돌려줄 때는 원화 대신 모작을 건넨다. 대부분의 수장가는 깜빡 속아 넘어갔다. 이래서 미불이 슬쩍 챙긴 작품이 천여 점에 이르렀다던가… 그런 그도 8세기 화가 대숭의 그림 앞에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어느 날 대숭의 소 그림 한 장을 얻어 단 하룻밤에 이를 베꼈다. 제 눈에도 흠잡을 데 없는 또 하나의 원화가 탄생했다 싶었다. 다음 날 그림을 되받으러 온 수장가에게 미불은 늘 하던 대로 자신만만하게 모작을 내놓았다. 이 수장가, 돌아간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문을 박차고 들이닥쳤다.
“이런 경을 칠 사기꾼아.”
생전 처음 반격을 당한 미불은 마지못해 원화를 내놓으면서 “아니, 이 소나 저 소나 터럭 하나 다른 게 없는데 어찌 알았소”라고 했다.
수장가가 분을 삭이며 하는 말.
“대숭이 그린 이 소 눈동자를 한번 봐라. 그 속에 소를 끌고 가는 목동이 비쳐 있는 걸 못 봤지?”
난다 긴다 하던 미불도 소 눈동자에 비친 목동까지야 어찌 발견했으랴. 탄식하던 그는 찬찬히 그림을 뜯어보다 한 번 더 경악한다.
“아니, 목동 눈에도 소가 있네…”
반전이 두 번.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려면 이쯤은 되어야.
[2]
인류의 세상살이가 그랬다. 비유컨대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했던가.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비유는 문인들 사이에서는 나름 유명한 모양. 원전은 이병주의 <산하>인 듯싶은데, 가끔 영문 모를 한자어들이 따라붙기도. 첫인상은 강렬하나 조금 뜯어볼라치면 그 의미를 헤아리기는 쉽잖은 문장.
[3]
마티스의 아틀리에를 방문한 한 부인이 오른팔을 유난히 길게 그린 여인상을 보고 잔뜩 찌푸리며 한마디 내뱉었다.
“내가 남자라면 당신 작품 속의 여자와는 차 한잔도 안 나눌 거예요. 이게 웬 괴물이람...”
마티스의 대답인즉 “부인, 뭔가 잘못 보셨군요. 이것은 여자가 아니라 그림이랍니다” 였다.
마티스는 ‘그림 속의 여자’와 ‘여자를 그린 그림’ 사이의 분명한 차이를 말했다.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는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무수히 착각하면서 그림을 해석한다.
IT는 예술이라는 영역을 강력히 변혁 중. 사진 기술의 발달이 끼친 영향보다 한층 더 강렬하게.
스마트폰의 확산으로 always-on camera가 일상이 된 지금, 그 여파는 대체 어디까지일지.
[4]
감정의 세계에선 진품을 알면 가짜도 알 수 있다고 한다. 진짜 속에 섞인 가짜를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가짜 더미에서 진짜 하나를 골라내는 것이 곧 감정가의 임무다.
대량 복제가 전제되는 문학이나 음악과는 달리 ‘원본은 오직 하나, 나머지는 모두 위작’이라는 미술의 속성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감정이란, 어쩌면, 돈.
그건 그렇고, 모작을 왜들 하려 드는지, 진품이니 가품이니를 굳이 가려 뭣에 쓰려는지. 저자 말마따나 “대가의 졸작이 있고 무명의 걸작이 있는 것이 예술의 세계”라, 해서, ‘내 안목으로 고르는 것이 걸작’인 마당에.
[5]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이 각막 이식 수술을 받고 나면 금방 세상을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한다. 건강한 사람의 시각을 갖기까지 수개월 또는 몇 년까지 걸리기도 한다는 의학계의 보고가 있다. 처음에는 밝음과 어둠만 구분한다. 나중에는 색깔의 차이를 식별한다. 그 다음으로 사물이 어렴풋하게 떠오르고, 그 사물을 배경과 따로 떼어내 판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시력을 되찾았지만 볼 수 없는 이유는 망막에 비친 것이 뇌에서 처리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각의 정보 처리가 뇌에서 이뤄지지 않는 한 우리는 보긴 하되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신기방통한 생명 작동의 메커니즘.
[6]
저자의 다른 책을 읽다가 어리숙한 말장난을 한심해 했던 기억이 또렷한데, 이 책은 그나마 좀 덜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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