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레신문사. 2004.9.25 초판 1쇄.
[1]
우리를 흥분시키는 건 대자연에 얽힌 놀라운 상상력이다. 이 신화에 담긴 상상은 씩씩하여 거침이 없다. 물길을 지져버리는 흑룡의 불칼, 그에 맞서 인간이 파낸 거대한 연못, 흑구름과 백구름이 맞부딪히는 한판 승부. 쓰러진 영웅을 되살려내는 여인의 가없는 눈물. 쉽게 만나기 어려운 대륙적 상상력이다.
‘백두산 천지의 탄생에 얽힌 곡절’에서 등장하는 저자의 소회. 마지막 부분의 ‘쉽게 만나기 어려운 대륙적 상상력’이란 구절이 여간 언짢은 게 아니다. 찬사를 늘어놓고 싶어 근질거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조상님들의 대단한 상상력’이라고 하는 정도로는 도무지 성에 차지를 않았던 모양. ‘대륙적 상상력’ 같은 게 실제로 따로 있기나 한지도 모르겠고, ‘대륙적 상상력’은 ‘반도적 상상력’보다 어떤 점이 더 대단하다는 것인지, 이 대목을 저자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썼는지, 여러모로 한심타.
[2]
신성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선택받은 고귀한 존재들한테서 오지 않는다. 버림받은 이들한테서, 박해받는 이들한테서 온다. 화려한 영광이 아니라 뼈아픈 시련과 고통에서 온다. 그것은 저만큼 높은 곳이 아니라 이만큼 낮은 곳에 있다. 여기 아프게 서 있는 너와 나, 우리가 바로 신성의 주인공이다.
이런 것이 한겨례의 민간신화 혹은 민중신화의 신성관. 이 땅에서는 신성이란 것이, 선택받은 고귀한 존재들한테서 오면 왜 안 되는지, 어찌 그리도 뼈아픈 시련과 고통이 필연적인지, 참 모를 일. 행복하면 절로 알아서 불안을 찾아댕기는 사고체계는, 도대체가 아름답지가 않다. 저자는 이걸 또 미화하고 싶었나 본데, 옛사람들이 그리 생각했었다는 것 정도만 알면 되지, 그걸 굳이 오늘날까지 치켜 세워 되살릴 필요까지야 있을지.
[3]
그렇게 자기를 버림으로써 얻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람과 같은, 양털과 같은 자유다.
‘관계’란 분명 골치 아픈 주제.
[4]
지극한 평온에 이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극락이다.
저자는 ‘극락이다’라고 쓰는 대신 ‘극락이 되는 셈이다’라고 썼다. 별 차이 없기는 하다. ‘지극한 평온’이 ‘극락’이라는 데에야 딱히 반론이 있기 어렵다. 그러고 보면, 번뇌라는 것도 ‘지극한 평온’을 방해하는 것, 요컨대 마음에 피어오르는 잡생각 아니겠나. 극락이고 번뇌고 말이 어렵지, 속뜻은 참 평범하다 싶다.
[5]
부제는 “우리 신들의 귀환을 위한 이야기 열두 마당”. 우리 신화 이야기는 재밌었으나, 어색한 고어체를 앞세운 저자가 시도때도 없이 등장하는 것은, 좀 고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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