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2016.05.04 초판 1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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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5) 알파고는 감정의 동요가 없다. 알파고는 세계 최정상급 기사인 이세돌 9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수를 했다 해서 위축되거나 바둑이 좋다고 방심하지도 않는다.
육체노동자를 대체한 기계의 강점이 ‘피로를 모른다’는 것이더니, 이제 ‘감정의 동요가 없다’는 점을 앞세워 정신노동도 대체하려나 보다. 수많은 감정노동자들에게는 희소식일 수도 있겠다.
[2]
(p.73) 어찌됐건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정말 “흥미롭다!”라고 할 만한 일이었다.
한국의 언론인들이 이세돌의 패배에 초점을 맞출 때, 서구의 언론인들은 ‘쿨한’ 기계의 등장에 관심을 기울이더란다. 동일한 팩트에 대한 다양한 의견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단순한 ‘흥미’ 수준을 넘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반드시 겪어야 할 필수적 경험이다. 이 땅에는 이런 경험이 워낙 귀하다.
[3]
(p.102) 이세돌 9단의 정신력에 깊은 경외심이 들었다. 대국 결과에 상관없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의 집념이 정말로 존경스러웠다. 만약 내가 똑같은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일단 이번 대결을 시작한 것부터 후회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기계에 진 것이 너무 분하고 원통해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기에 급급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의 패배를 축소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며 시간을 보냈을 거다. 또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의 평판을 고민하며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세돌 9단은 쓸데없는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패배를 직시하고 내일의 승부를 위해 오로지 앞으로, 또 앞으로 달려갔다.
나 역시 별다른 고민 없이 저자와 같은 처신을 했을 듯싶다. 승부사의 기질을 갖는다는 것, 승부사로 산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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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22) 알파고와 달리 사람의 바둑은 수 계산 말고도 여러 가지 요인들이 승부에 영향을 미친다. 마인드 컨트롤, 직관력, 기세싸움, 승부 호흡, 컨디션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도 급수가 올라가고 고수가 될수록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다. 마음 다스리기는 ‘평정심’과 ‘반전무인’으로 집약된다.
평정심이 중요한 이유는 뭘까. 사람의 감정의 동물인지라 형세에 따라 마음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날뛴다. 바둑이 불리해지면 감정이 상해 날름 포기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심리이다. 하지만 불리한 상황을 참고 납작 엎드려 있다가 역전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려야만 승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유리할 때는 마음을 더 조심해야 한다. 바둑이 유리하면 나도 모르게 방심해서 설렁설렁 쉬운 길을 택하다가 역전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둑에서는 유리하나 불리하나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과 싸운다는 말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바둑만큼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말이 잘 맞는 게임도 없다. 바둑을 두면 계속해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훈련을 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반전무인’은 바둑판 앞에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바둑을 두라는 뜻이다. 바둑은 혼자 두는 게 아니다. 바둑판 앞에는 나의 상대가 앉아 있다. 이겨야 하는 상대를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런데 지나치게 상대를 의식하다 보면 상대의 기세나 스타일에 휘둘려 내가 원하는 바둑을 두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상대를 의식하지 말고 내 중심을 지키며 나만의 바둑을 두라는 말이다.
게임 혹은 스포츠의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바둑의 경구 중에는 귀담아 들을 만한 구절들이 적잖다. 당나라 혹은 송나라 때 만들어졌다는 위기십결은 ‘바둑을 잘 두는 열 가지 비결’을 넘어서는 깊은 울림이 있다.
부득탐승.
입계의완.
공피고아.
기자쟁선.
사소취대.
봉위수기.
신물경속.
동수상응.
피강자보.
세고취화.
바둑을 두는 자세는 아니다 보니 위기십결에 들지는 않지만 반전무인 역시 인상적인 경구. 자존감이 어쩌고 타자의 욕망이 저쩌고 하는 것들도 결국은 반전무인적 처세의 또 다른 표현들.
[5]
(p.231)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가 끝나고 모든 것이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충격에 와해될 것 같았던 바둑계도 활기를 되찾았다. 연일 이세돌 9단과 알파고 관련 뉴스를 대서특필했던 언론도 시들해졌다. 시끌벅적했던 온라인 커뮤니티도 잠잠해졌다. 마치 한 편의 블록버스터 영화가 끝난 것 같다.
이 영화의 주연은 이세돌 9단, 조연은 하사비스와 알파고, 신 스틸러는 아자황 연구원이다. 실체가 없는 알파고를 조연으로 쳐줘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찌 됐건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최선을 다한 출연자들도 많다. 이들 덕분에 영화는 성공리에 종영했다. 인간의 좌절과 도전, 감동과 휴머니즘이 적절히 어우러진 웰메이드 영화였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영화관의 불이 켜졌다. 영화가 남긴 감동에 가슴이 먹먹하다. 진한 여운이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고 영화관을 나왔다. 꽃이 만개했다. 일상이라는 또 다른 드라마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책의 마지막 대목. 2016년 3월의 알파고 열풍의 뒷모습을 절묘하게 묘사했다.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고 영화관을 나섰더니 꽃이 만개했다’는 대목에는 쓴웃음이 난다. 마침 3월이라 이런 표현이 떠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 땅의 봄은 더 이상 꽃이 만개하는 따사로운 계절이 아니다. 중금속을 잔뜩 실은 서쪽의 모래먼지 뒤덮이는 잿빛 계절이 된 지 이미 오래.
[6]
2016년의 알파고 열풍을 등에 업은 책. 한가위 연휴 하루 전 날, 가족들과 가까운 놀이동산으로 나섰다. 어차피 줄 설 일도 많을 듯싶어 무료할 때마다 가볍게 읽을 요량으로 가방에 챙겨 넣었다. 반나절 정도에 읽기에 알맞다. 적당히 재밌고, 적당히 교훈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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