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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채사장] 시민의 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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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일북. 2015.12.24 초판 1쇄. 2015.12.31 초판 3쇄

 

 

[1]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객관적인 자료들을 선별적으로 선택해서 이용할 수만 있을 뿐, 현실에 대한 해석은 항상 주관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당연한 얘기를 거창하게 썼다. 그 일상적 쓰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이란 그저 기만의 도구, 아무리 잘 봐준대도 편의의 발상이라 판명난지 오래.

 

 

[2]

 

서구의 플라톤 철학이나 동양의 유학 사상부터 마르크스 이론과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국가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게 제시되어왔다. 그것은 국가의 개념이 고정된 무엇이라기보다는 시대와 사회의 요구에 따라 변화하는 유동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국가’만이 아니다. 어떤 낱말이든 다양한 정의를 갖는다면 그것은 그 말이 시대와 사회의 요구에 따라 변화하는 유동적인 개념인 까닭이다.

 

 

[3]

 

백성百姓의 사전적 정의는 ‘국민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다. 한자를 풀어보면 ‘백 가지 성씨’가 된다. 다양한 성을 가진 사람들의 무리. 글자의 뜻만 본다면 오늘날의 사람들을 백성이라고 불러도 틀린 것은 아니다.

저자도 언급하듯 백성은 피지배층이라는 어감 때문에 오늘날의 사람들을 지칭하기에는 적절한 어휘가 못 된다.

       어감이란 참 미묘해서, 낱말의 생사를 좌우하기도 한다. 일상어로서의 수명을 다한 ‘동무’는 아쉽기 그지없는 낱말 중 하나.

 

 

[4]

 

때로는 긴 대화보다도 상대방이 사용하는 단어가 그 사람의 내면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그런 까닭에 “나는 신문이 나오면 먼저 아랫도리부터 본다” 같은 저급한 문장을 구사하는 방상훈이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인물이기는 쉽잖다.

 

 

[5]

 

왕이 존재하는 국가체제를 군주제라고 한다. 군주제에 반대되는 개념이 공화제다. 왕이 존재하지 않는 국가체제를 말한다. 우리말은 한자를 정확히 알지 못해도 대략적으로 그 단어의 원래 뜻을 가늠해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공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화는 ‘공공의 것’을 뜻하는 라틴어 ‘레스 퍼블리카res publica’에서 왔다. 국가가 특정인의 소유가 아니라 모두의 것이라는 의미이므로 그럴듯하다. 한자를 풀어보면 ‘한 가지 공共’에 ‘화할 화和’로, ‘한 가지로 화합하다’ 정도의 의미가 되겠는데, 무언가 부족하다. ‘공화’의 어원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는 여러 설이 있다. 그 중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중국의 특정 시대에서 기원을 찾는 설명이다. 중국에 왕이 없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 시기의 이름이 ‘공화시대’였다는 것이다. 기원전 9세기 중엽, 중국 주나라에 왕이 없는 14년의 시기가 이어졌는데, 이때가 공화시대로 불린다. 왜 14년 동안의 기간을 공화시대라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우선 왕이 자리를 비운 사이 주공과 소공이라는 두 제후가 함께 정치를 관장했기 때문에 ‘공화’라는 설이 있다. 다음으로 ‘공’나라 땅의 제후였던 ‘화’라는 사람이 왕의 업무를 대행했기 때문에 ‘공화’라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후에 ‘리퍼블릭’을 번역해야 했던 일본의 번역가들이 적절한 낱말을 찾던 중에, 왕이 없던 중국의 이 시기에서 단어를 차용한 것이 ‘공화’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이 나라는 ‘민주공화국’. 그 어원도 제대로 모르는 말이 이 나라 사상의 기저라는 말이다. ‘함수’도 그렇고 ‘유리수’도 그렇고, 이 나라 몇몇 일상어들은 참 근본이 없다.

 

 

[6]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를 최선의 정치체제로 알고 있고, 그 가치를 지켜나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역사에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소수에 의한 엘리트주의를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목도하면서, 플라톤은 민주제를 어리석은 다수에 의한 정치라는 의미의 ‘중우정치’라고 말했다. 그리고 난폭한 대중에 의한 정치라는 뜻으로 ‘폭민정치’라고도 말했다.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였다. 다수의 가난한 자들에 의한 정치라는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빈민정치’라고 규정했다.

그 시대의 다수를 보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어지간히 답답했던 모양. 오늘의 다수를 보는 나 역시 그리 다르지 않다.

 

 

[7]

 

정치는 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근본을 크게 벗어날 수 없다.

이 본질을 간과한 모든 논의는 무의미하다. 공동체적 가치를 중시하는 계급의 음성이 마침 두드러진다면 그 사회가 그저 운이 좋은 것.

 

 

[8]

 

건물이 낡아가는 것은 토지의 가격 상승으로 상쇄된다. 토지는 감가상각이 되지 않는다.

인과가 흐릿한 사안들을 이어붙였다. 토지의 가격 상승이 감가상각이 되지 않기 때문인 듯 서술했으나, 감가상각이 안 된대서 가격이 필연적으로 상승할 이유는 없다. 토지의 수요가 끊임없을 뿐.

 

 

[9]

 

노동의 신성함에 대한 강조는 사회 구성원들이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그렇지 못한 노동자가 있고, 이로 인해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며, 그래서 노동의 대가로 최소한의 삶만을 겨우 유지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면, 그 사회에서 노동의 신성함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비열한 행위는 없습니다.

노동의 재정의를 위해서라도 일상의 과학기술은 서둘러 발전해야.

 

 

[10]

 

사람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통해 교육됩니다. 물론 학생들은 학교 선생님의 말이나 교과서의 글에서 배움을 얻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쉽게 잊힙니다. 그런데 결코 잊히지 않고 체화되는 것들이 있죠. 그것은 학교 시스템이라는 형식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들입니다. 학교의 형식은 우리를 가르치지 않으면서 가르치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배우지 않으면서 배웁니다.

저자 말마따나 교육은 대개 형식보다는 내용을 앞세운다. 그러나 개인은 내용만큼이나 형식을 통해 배움을 체화한다. 버텔 올먼이 <마르크스와 함께 A학점을>에서 다룬 주제가 바로 이것.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때가 되었다는 이유로 시작되는 교육은 그 실체를 색안경을 쓰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11]

 

우리는 공정한 경쟁이라면 그 결과는 정당하다고 믿는다. 경쟁 자체는 정당한데, 자신이 무능해서 경쟁에서 실패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사회적 위선이다. 즉, 실제로는 사회의 부조리로 발생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경쟁이라는 형식은 이러한 문제의 책임을 사회에서 개인으로 전환한다.

‘공정한 경쟁’이란 ‘객관’만큼이나 허구적인 어구.

 

 

[12]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행위는 무의미하지는 않겠지만, 매우 소모적인 일이다.

객관에 대한 기대를 접으면 부질없는 짓을 면하게 된다.

 

 

[13]

 

어떤 경제체제를 선택할 것인가, 이것이 정치적 정의 문제에서의 근본 물음이 된다.

그리고 정치란 본질적으로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고. 그러니 자신과는 다른 계급을 대변하는 세력에 투표하고서 사회가 왜 자기의 기대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지 의아해 한다면 어리석달밖에.

 

 

[14]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 꽤 괜찮았다. 그에는 다소 못 미치는 듯.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시민’들이 알아야 할 지식이란 것이 한 줌어치에 불과한데도, 이조차 모르는 사람이 차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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