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스트. 2004.1.12 초판 1쇄.
[1]
여기 적힌 사실들을 모두 믿지 마시라. 이것은 그저 하나의 버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주체의 위치에 따라, 초점과 앵글에 따라 전혀 다른 버전들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김홍민이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에서 주장한 “한 권의 책을 쓰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뻔뻔함이다”와 비슷한 분위기.
결국 개인의 경험을 살다 간다. 무슨 말을 할지, 무엇을 들을지 역시 각자의 자유의지.
[2]
청년들이 금간판이나 내걸고 있는 지도자를 찾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차라리 벗을 찾아 단결하여, 이것이 바로 생존의 길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 나으리라. 그대들에게는 넘치는 활력이 있다. 밀림을 만나면 밀림을 개척하고, 광야를 만나면 광야를 개간하고, 사막을 만나면 사막에 우물을 파라. 이미 가시덤불로 막혀 있는 낡은 길을 찾아 무엇 할 것이며, 너절한 스승을 찾아 무엇 할 것인가?
가르침과 배움의 주체가 강력히 역전되는 세상이, 무조건 옳다.
[3]
주거공간은 아무리 넓어도 사적 공간일 뿐이다. 거기서 뭔가 새로운 관계와 활동은 구성되지 않는다. 늘어나는 유지비에 청소하느라 시간과 힘만 더 들 뿐이다.
좁은 땅덩이에 오글오글 모여 사는 바람에 공간에 치부의 수단이라는 이미지가 잔뜩 꼈다. 말로는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들 떠들지만, 어느 누구 하나 그리 사는 이 없는 것이 현실.
[4]
하나의 유형과 척도를 고집하기 때문에 결과가 거기에 맞지 않으면 좌절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실험을 계속 이어갈 수가 없다. 하지만 다양한 척도를 적용하게 되면 실패란 있을 수 없다.
실패를 그저 예정된 결과와의 괴리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실패란 자고로 쓰라리게 마련.
실패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조언들은 대개 실패를 ‘과정’이나 ‘실험’으로 바라보라는 것. 실패의 대명사인 에디슨은 전구를 만들 때 만 번을 실패하고서는 만 개의 잘못된 방법을 성공적으로 찾았다는 말을 남겼다.
[5]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교육열을 자랑하는 나라이지만 앎이 기쁨이라는 전제는 잊혀진 지 오래되었다. 아마 대개의 사람들은 앎이란 그저 어려운 과정을 참고 견디는 것, 고통을 감내하면서 획득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고통을 감내하면서 획득하려는 것이 정작 내용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의 시작. 입시 혹은 자격 획득의 과정을 공부라 혼동하는 것부터 바로잡고 봐야 한다.
[6]
문턱을 한꺼번에 넘기는 어렵지만 하나씩 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대개는 단번에 정상에 도달하려 하기 때문에 단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법이다.
자기계발서의 단골 주제. 뭔가를 이룬 사람들의 일관된 증언. 현실 세계에서의 궁극의 진리.
[7]
강의의 가장 큰 조건은 가르치는 이가 그 내용에 매혹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서, 만만한 밥벌이의 수단으로 교육자의 길을 택해서는 안 된다. 요즘의 공교육이 심히 우려되는 것도 어쩌면 이 때문.
[8]
공동체는 명분이 무엇이든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방식은 다를지언정 구성원 개개인의 삶이 비옥해지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의든 타의든 몇몇은 이 과업의 달성을 담당해야 한다. 국가라면 이른바 정치인들이 그런 역할. 이 나라 정치인들이 자산 축적과 기득권의 대물림에 평범한 서민들보다 열을 올리는 한, 이 나라가 제대로 된 공동체가 될 가능성은 제로.
[9]
따지고 보면 우리는 단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소모하는가? 단지 남과 같이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얼마나 불필요한 짐들을 안고 살아가는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청춘을, 아니 일생 전부를 온전히 탕진하고 있지 않은가?
책을 몇 권만 뒤적여도 이런 구절은 숱하게 만날 수 있다. 투덜대는 책을 몇 권 쓴 김정운은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는데, 그것만으로도 그는 박수 받아 마땅.
[10]
자본이란 욕망의 홈 파인 공간을 따라 흐르면서 그 홈을 더더욱 깊게 파이게 하는 속성을 지닌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한 짝이 된 것이 짐작컨대 현대사의 최대 비극.
[11]
이름이 없는 것과 이름이 많은 것은 고유명사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궤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관점.
[12]
니체는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철학자지만 나는 딱 하나 불만이 있다. 그는 동물의 비유를 즐겨 썼는데, 대개가 틀렸다.
20세기 이전의 사상들은 사실로서보다는 의견이라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게 속 편하다. 지금도 제대로 아는 것이 한 줌어치인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망상을 진리라 떠받들던 시절의 사람들이 뭘 그리 알았겠는가.
[13]
행복이 아니라, 덜 불행해지기 위해 사는 불쌍한 도시인들!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는 듯.
[14]
부제가 책을 잘 설명한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
지은이가 기획한 연구공간의 성장과 일상은 재미있지만, 기반이 되는 철학적 인용은 의심스러운데, <지적 사기> 이후 ‘탈근대’ 철학에 대한 의심이 좀 더 노골적이 된 것도 아무래도 한몫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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