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일 내가 고등학생 때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면 ‘수포자’가 되지 않았을 텐데.
- 최재천(생물학자,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 《수학이 필요한 순간》 (김민형, 2018, 인플루엔셜) 추천사 중에서
☆ 최재천: 서울대 졸업, 하버드대 생물학 박사, 서울대 교수, 이화여대 석좌교수
세기의 지성, 시대의 지성이라 불리는 이들 중에도
학창 시절 수학 공부만큼은 신통찮았노라 아쉬워하는 이들이 간혹 있다.
명문대를 졸업한 이들 중에도
다만 대중을 상대로 그런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을 뿐
이런 사정에 공감하는 경우가 적잖을 것이다.
똘똘했던 그들이 수학 앞에서는 어찌 그리 맥을 못 췄을까.
그들이 똘똘하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다.
그들은 수학을 잘 하기에는 너무 좋은 머리를 타고난 것이다.
길동이는 친구들과 보드게임을 하고 있다.
그때, 똘똘이가 놀러 온다.
“와~, 처음 보는 보드게임이네?”
똘똘이는 철수 옆에 끼어 앉는다.
철수가 조금 불리해지자, 구경하던 똘똘이가 한 마디 슬쩍 거든다.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똘똘이는 철수가 불리하다 싶으면 슬쩍슬쩍 훈수를 둔다.
시간이 흘러 이제 철수와 똘똘이는 아예 한 팀인 듯 게임을 진행한다.
엎치락뒤치락하던 게임은 훈이가 아슬아슬하게 이기는 것으로 끝이 난다.
“아, 아깝다!”
“야, 한 판 더 해!”
“똘똘아, 너도 같이 할래?”
게임에 참여한 똘똘이는, 압도적인 실력으로 게임을 이끌어 나간다.
영리한 똘똘이에게는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이런 기억이
훗날 똘똘이가 수학 앞에서는 맥을 못 추게 되는 강력한 복선이다.
똘똘이의 보드게임 이야기는 결론이 뭘까?
‘똘똘이는 게임의 규칙을 모른다는 것.’
보드게임에는 규칙이 적힌 게임설명서가 함께 제공된다.
똘똘한 똘똘이는 게임설명서를 애써 읽지 않는다.
그저 친구들의 게임을 지켜보기만 한다.
그 정도로도 규칙을 이해하고 전략을 세우는 데 전혀 부족하지 않으므로.
그러나 수학은 다른 이들이 플레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좋은 플레이어가 될 수 없다.
극소수 천재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대다수 수재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수학을 힘겨워했던 수많은 문과 수재들이 그 증거다.
규칙을 짐작하는 대신, 게임설명서를 읽어야 한다.
수포자가 된 세기의 지성들은
규칙을 짐작하는 대신
주어진 게임설명서를 꼼꼼히 읽을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2]
“수학을 왜 공부해야 하나요?”
이 물음을 수학을 공부하는 이유에 대한 순수한 의문이라 여겨
정성껏 답을 내놓는 수학교양서도 적잖은데,
이런 질문을 하는 학생의 - 가끔은 학부모의 - 속내는
대개 수학공부를 정말이지 하기 싫다는 의사표현에 가깝고,
해서, 이 질문에 대한 답 또한 그리 어렵지 않다.
“수학을 왜 공부해야 하나요?”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선 질문부터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학생들이 말하는 “수학을 왜 공부해야 하나요?”라는 물음은
“학교수학을 왜 공부해야 하나요?”를 잘못 말한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수학은 학교수학이지 학문으로서의 수학이 아니다.
학문으로서의 수학은 그들에게는 결코 관심의 대상이 아니므로.
대학서열화가 고착화된 데다가
입학은 어렵고 졸업은 쉬운 환경이다 보니
학교수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두 말 할 것 없이, 밥 벌어 먹고 살기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이다.
조기교육, 선행교육, 심화교육, 사고력 수학 혹은 창의 수학, KMO 등등의 모든 수학 교육은
오직 “학교수학을 잘 하는 - 정확히는, 내신이든 수능이든 학교시험의 결과가 좋은 - 고등학생”이 되는 것이 그 목표다.
대한민국 입시 과목인 수학이 태권도로 교체된다면
사교육 시장에서 수학이 차지하는 몫을 태권도가 가져갈 것이라는 데에, 그 어떤 의문이 있을까.
이 땅에서 먹고 살아가야 할 형편인데, 달리 재능이 없다면,
현재의 입시 구조에서는, 수학 공부를 외면하기는 쉽잖다.
이런 점에서 “학교수학을 왜 공부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은 어쩌면 무의미하다.
아무래도 “어떻게 하면 학교수학을 잘 할 수 있나요?”가 좀더 현실적인 질문일 텐데,
이 질문은 “학교수학은 무엇을 공부하나요?”로 바꾸어야 비로소 쓸모있는 답에 닿을 수 있고,
이 물음이 바로 어릴 적 신동이라 불리던 문과 수재들이 간과하는 바람에
학창시절 수학만큼은 힘겨웠노라 아쉬워하게 된 배경이다.
[3]
학교수학에서는 뭘 공부할까?
달리 말해, 학교수학에서는 어떤 능력을 평가할까?
산술, 대수, 기하, 확률 등을 답으로 떠올렸다면, 미안하지만, 오해다.
12년 동안 수학을 배운다. 그렇게 긴 시간과 많은 노력을 들여 고생했건만, 그 내용이 실제 수학이라는 학문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정말 허탈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오늘의 학교 수학은 여전히 요리책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수학 학습을 요리 레시피를 익히는 것쯤으로 인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 공식에 대입하여 이렇게 식을 조작하면 답이 나온다’는 기계적인 문제 풀이를 수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시간을 들여 수학을 공부했건만 정작 수학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 《피타고라스학파의 집단살인》 박영훈, 2017, 가갸날
☆ 박영훈: 서울대 졸업, 몬타나 주립대 석사, 수학교사, 홍익대 겸임교수
학교수학은 실제 수학이라는 학문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학교수학은 요리책이고, 수학 학습은 요리 레시피를 익히고, 그 레시피로 요리하는 것이다.
학문으로서의 수학의 관점에서는 수학 학습을 요리 레시피를 익히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문제이지만,
학교수학에서는 정반대다.
학교수학에서는 수학 학습이 요리 레시피를 익히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교과서에 제시된 규칙들이 레시피다.
시험은 그 레시피들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을 평가하는 수단이다.
그러니 학교수학을 잘 하고 싶다면,
학교수학은 요리책이며,
시험은 “주어진 레시피를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을 평가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때, “주어진 레시피를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이라는 문구에서 가장 중요한 낱말은 ‘주어진’이다.
이 점이 바로 문과 수재들이 어릴 적 간과한 부분인데,
똘똘한 그들이 수포자의 길로 접어든 까닭은
스스로의 레시피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나는 바람에
주어진 규칙을 학습하고 적용하려 애쓰는 데에 소홀했던 탓이다.
학교수학은, 학문으로서의 수학과는 거리가 먼, 하나의 ‘규정집’이라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똘똘한 머리로
주어진 규칙은 무시한 채 자신만의 규칙을 궁리하는 대신
주어진 규칙을, 정확히 이해하고, 적용하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4]
개념서니 유형서니 해도 대다수 시중 교재는 문제집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문제를 푸는 것이 수학공부라는 오해가 생긴다.
문제를 푸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 확인이다.
문제를 풀면서 알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 있으니 문제를 푸는 것이다.
그러니 문제를 앞에 두고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까?”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문제는 무엇을 묻는가?”라고 생각해야 한다.
딱히 아는 것 없는 문제를 더듬더듬 퍼즐처럼 풀어나가면 안 된다.
알고 있는 규칙 중에서 문제가 무엇을 확인하려고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문제가 묻고 있는 규칙을 모른다면 문제를 푸는 대신 해당하는 규칙을 학습하는 것이 먼저다.
마침 알고 있는 규칙을 문제가 묻는다면, 알고 있는 규칙에 따라, 답을 하면 된다.
문제가 어떤 규칙을 묻는지 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런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게 오히려 ‘비정상’이다.
규칙을 알고 있고, 문제가 바로 그 규칙을 묻고 있는데, 문제를 못 푼다니,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문제를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로 나누는 버릇을 고쳐야 한다.
문제는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아는 문제와 모르는 문제로 나뉜다.
다른 이들이 고난도 문제라 하더라도, 내가 아는 규칙을 묻는다면, 담담히 답하면 된다.
문제가 분명 알고 있는 규칙을 묻는 것이 확실한데도 풀리지 않는다면,
대체 왜 풀리지 않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밝혀야 한다.
[5]
강약약강.
강자에 조아리고 약자에 군림하는 최악의 처세.
그러나 이 비열한 처세술이 학교수학을 대하는 모범적 자세다.
길동이는 백 명이 모여사는, 철저히 서열화된 마을의 일원이다. 길동이의 서열은 99등. 위로 98명, 아래로 1명.
이 마을이 학교수학 마을이라면, 길동이는 치열하게 강약약강의 처세를 지켜야 한다. 자기보다 서열이 높은 98명을 목숨 걸고 피하고 오직 한 사람, 서열 100등을 처절하게 괴롭혀야 한다. 소위 눈도 못마주칠 정도로.
학교수학을 공부할 때는 광개토대왕처럼 새로운 대지를 점령하려 나서는 대신 내 땅에서 그 어떤 반란의 싹도 자라지 않도록 삼족, 구족을 멸하겠노라 으르렁대어야 한다.
학교수학은 공부를 할수록 아는 것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할수록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경계가 뚜렷해지는 것이다.
[6]
“규칙대로 했다, 어쩔건데!”
학교수학을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다.
이런 뻔뻔함을 보이려면 일단 규칙을 알아야 한다. 규칙을 알아야 규칙대로 할 것 아닌가.
규칙을 알아야 한다. 확실하게,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 오직 규칙, 규칙대로 했다는 뻔뻔함이 필요하다.
아는 규칙을 묻는 문제는 확실히 답하고, 모르는 규칙을 묻는 문제는 손도 대면 안 된다.
문제 앞에서 규칙을 무시한 채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려 들면 안 된다.
초등학교 때 두각을 나타내다가 고등학교 때 수학에 절절매는 학생들이 대개 이런 부류다.
이들은 수학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좋은 머리를 타고난 것뿐이다. 좋은 머리라 한들 대개 초등학교 수준의 수학을 스스로의 기발함으로 해결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평범한 수재가 수많은 수학자들이 수천 년간 인생을 갈아넣어 발견한 수학 규칙들을 스스로 발견하기는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 잘난 뉴턴조차도 - 맥락이야 어찌 되었건 - 자기는 그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섰을 따름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7]
수학이 인정하는 공부는 따로 있다.
공부인지 아닌지는, 엄마도 아니고 교사나 학원강사도 아니고, 오직 수학이 판단한다.
제 아무리 좋은 머리를 타고 났다 해도 수학이 인정하는 공부의 범위를 벗어나는 순간 고전을 면하기 어렵다.
[8]
중학교 3학년 교과서는 제곱근의 규칙을 알려 준다.
$3$과 $-3$을 각각 제곱하면 $9$이다. 즉, $3^2 = 9, (-3)^2 = 9$이다.
또, 제곱하여 $9$가 되는 수는 $3$과 $-3$뿐이다.
이와 같이 어떤 수 $x$를 제곱하여 $a$가 될 때, 즉 $x^2 = a$일 때, $x$를 $a$의 제곱근이라고 한다.
- 중학교 3학년 수학 교과서, 박교식, 동아출판 (이하 같음)
규칙을 공부할 때는 ‘뭐, 그런가 보죠’라고 생각하지는 않기 바란다.
수학과 굴욕적인 불평등조약을 맺고 싶지 않다면.
$3$과 $-3$을 각각 제곱하면
그러려니 하지 말고, 직접 제곱해 보자.
제곱은 같은 수를 두 번 곱하는 것이다. 그러니 $3$의 제곱이란 $3 \times 3$이고, 그 값은 $9$다.
음수인 $-3$을 제곱할 때에는, 부호가 같은 두 정수를 곱하는 규칙(중학교 1학년 정수 단원)을 알아야 한다.
부호가 같은 두 정수의 곱은 두 수의 절댓값의 곱에 양의 부호를 붙인 것과 같다.
- 중학교 1학년 수학 교과서, 박교식, 동아출판
부호가 같은 두 정수를 곱하는 규칙에 따라, $(-3) \times (-3)$ 역시 $9$다.
요컨대, $3$과 $-3$을 각각 제곱하면 $9$가 된다.
$3$과 $-3$을 각각 제곱하면 $9$이다.
즉, $3^2 = 9, (-3)^2 = 9$이다.
방금 확인한 결과와 같다.
또, 제곱하여 $9$가 되는 수는 $3$과 $-3$뿐이다.
잠깐만.
이 대목은 반칙이다.
교수인 저자가 중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지식을 강요하는 현장이다.
$3$을 제곱하면 $9$가 된다는 건 알겠다.
$-3$을 제곱해도 $9$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제곱해서 $9$가 되는 수가 $3$과 $-3$뿐이라니?
이럴 때 교과서의 저자들은 흔히 다음과 같은 어법을 쓴다.
“제곱하여 $9$가 되는 수는 $3$과 $-3$뿐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실 제곱해서 $9$가 되는 수가 $2$개뿐이라는 설명은
제곱근 규칙이 등장한 지 2년이 지난 후인 고등학교 2학년 수학I에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실수 $a$의 $n$제곱근은 복소수의 범위에서 $n$개가 존재함이 알려져 있다.
- 수학I 교과서, 박교식, 동아출판
고등학교 2학년들을 대상으로도 ‘알려져 있다’고 말하는 마당에,
아직 복소수가 뭔지도 모르는 중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제곱하여 $9$가 되는 수는 단 두 개 뿐이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 들이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