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숲. 2011.7.15 초판 1쇄. 2018.9.24 개정증보판 1쇄.
[1]
기독교가 천동설을 잘 받아들인 데는 항성천구 바깥으로 천당과 지옥을 배치할 만한 넓은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스티븐 호킹은 풀이하고 있다.
인간의 망상.
다른 짐승, 다른 풀들은 아무 관심 없는 일에 난리법석을 떤다. 허구를 빚는 능력이 호모 사피엔스의 생존 기재라던가. 진화론의 관점으로 보면 생존에 몸부림치는 DNA가 희한한 전략을 만들어낸 셈. 그러나 지극히 당연한 진리가 하나 있으니:
자연은 인간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2]
베이컨도 지동설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1636년에 설립된 하버드 대학에서도 수십 년간 천동설을 가르쳤다.
베이컨이나 하버드 대학은 별 잘못이 없다. 초기에는 천동설의 정확도가 지동설을 앞섰다. 천동설과 지동설이 그저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모델이라는 점에서 당대 사람들은 나름의 합리적 의사결정을 내린 것.
그런 점에서 “모든 발견과 견해 중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만큼 인간 정신에 큰 영향력을 끼친 것은 없을 것이다.”는 괴테의 서술은 아무래도 과하다. 실상 천동설과 지동설의 경합이 문제가 아니라 이른바 종교가 말썽인 것이다. 해서, 종교만 내려놓고 나면, 태양과 지구의 경우에는 태양 쪽이, 지구와 달의 경우에는 지구가 상대적으로 무거워서, 얼핏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달이 지구의 주위를 도는 듯 보이는 것일 뿐, 실제로는 서로가 서로의 주위를 도는 마당에, 천동설이든 지동설이든 천체의 운행을 설명하는 하나의 모델에 지나지 않으니 좀 더 편하고 잘 맞는 쪽을 쓰면 된다. 달력의 양력과 음력이 그러하듯이.
기원전 3세기 지동설을 주장했던 아리스타르코스가 별 주목을 받지 못한 반면, 코페르니쿠스는 후대에 대단한 주목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가 태양 중심의 우주론을 예측하기는 했지만, 태양중심설을 최초로 수학적으로 예측한 사람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였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 가능. 지동설이란, 딱 그 정도.
[3]
지구상의 모든 물질을 원자핵과 전자의 빈틈없는 덩어리로 압축한다면 지름 200m의 공을 얻을 수 있다.
작은 듯도 싶고, 큰 듯도 싶고.
[4]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우리 은하를 우주의 유일한 은하로 알았다.
당대 혹은 그 이전 시대 저작물들의 지적 한계는 여기까지.
[5]
만일 태양이 빛을 내지 않는다면 이 넓은 태양계 안에 인간은커녕 바이러스 한 마리 살 수 없을 것이다. 지구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에너지, 곧 수력, 풍력, 하다못해 미운 놈 한 대 쥐어박는 힘까지 태양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 고로 태양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어머니다.
어느 대목에서 확신이 덜 섰기에, ‘거의’라는 수식어를 동원했을까.
[6]
나름 자연과학 분야 추천도서 목록에 이름이 올랐으나, 영문학과 출신인 저자의 한계가 가끔 눈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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