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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180.심리학

189 [김정운]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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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북스. 2019.5.15 초판 1쇄. 2019.5.24 초판 1쇄.

 

 

[1]

 

(p.7) 그래서 자동차만 타면 절대 안 비켜주는 거다. 남자들에게 존재가 확인되는 유일한 공간은 자동차 운전석이다. 자동차 운전석만이 내 유일한 ‘슈필라움’이라는 이야기다. 내 앞의 공간을 빼앗기는 것은 ‘내 존재’가 부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렇게들 분노와 적개심에 가득 차 전전긍긍하는 거다.

프롤로그의 한 대목. 슈필라움은 놀이Spiel와 공간Raum의 합성어. 간단한 풀이는 ‘여유 공간’, 정교한 풀이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

       슈필라움 같은 고상한 낱말만 들이밀지 않았을 뿐, <남자의 공간>에서 이문희도 똑같은 소리를 한다.

 

우리나라 남자들은 왜 그렇게 자기 앞으로 끼어드는 자동차만 있으면 화를 참지 못하고 분노하는가? 그것은 자동차만이 남자들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공간이기에 ‘그 앞을 막는 자’는 절대 용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이문희, <남자의 공간>

<남자의 공간>에서 이 구절을 읽은 첫 소감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주장을 사실인 양 태평스레 늘어놓다니 이해할 수 없는 심보다.

       그런데 어려운 심리학을 쉽게 풀어 쓰는 재주가 있는 김정운이 똑같은 소리를 늘어놓는다. 김정운이 평소 자신의 주장을 부각시킬 의도로 자극적인 예를 드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럴듯한 낱말로 살까지 붙인 김정운 쪽이 훨씬 더 사악.

       끼어들기에 광분하는 건 남자나 공간의 문제가 아닌 인성의 문제.

       견강부회들 때문에 사회학이 도무지 사회과학이기 쉽잖다.

 

 

[2]

 

(p.60) 오십 대 후반의 나이가 되도록 ‘사용가치’가 판단 기준이 되지 못하고, 추상적 ‘교환가치’에 여전히 마음이 흔들린다면 인생을 아주 잘못 산 거다.

집을 사용가치로 바라보면 ‘사는 곳’이 되고, 교환가치로 바라보면 ‘사는 것’이 된다. 오십 대고 육십 대고 교환가치가 지상과제인 나라. 식민과 전쟁의 경험을 십분 고려하더라도, 이 땅의 행태는 과해도 너무 과하다.

       사용가치의 잣대가 교환가치로 대체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병폐인지에 대한 증언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가 독보적.

 

 

[3]

 

(p.68) ‘담론적’이어야 할 학문적 개념을 ‘단언’하는 사회는 아주 ‘후진 사회’다.

후지다: 형용사. 품질이나 성능이 다른 것에 비해 뒤떨어지다. 김정운의 책에서만 만날 수 있는 생생한 우리말.

 

 

[4]

 

(p.83) 아무리 돈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다한들 밤마다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성공인가.
       자주 웃고 잠 푹 자는 게 진짜 성공이다!

진리란 자고로 단순자명!

 

 

[5]

 

(p.176) 김정은이 나타나면 감격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박수 치고 눈물까지 흘리는 저 북한 사람들을 위해 우리 각자는 그 엄청난 ‘통일세’를 수십 년 동안 기꺼이 낼 수 있을까? 통일 후, 북한 사람들이 남한 사람들의 오만함에 분노하여 ‘김정은 시절이 더 좋았다’며 ‘조선노동당’을 다시 창당하면 도대체 무슨 느낌이 들까? 그 ‘조선노동당’이 북한 지역에서 몰표를 얻어 대한민국 국회의 한구석을 당당히 차지하는 모습을 ‘가족처럼’ 편안하게 지켜볼 수 있을까? (이는 독일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전쟁이든 담판이든 통일의 수단과 무관하게, 사적 자치의 원칙과 결사의 자유가 보장된 남쪽 체제로 통일되는 한 발생가능한 이야기.

       통일은 대박이라던 파면된 대통령, 대통령이 ‘남쪽 정부’, ‘북쪽 정부’라는 표현을 썼다고 난리를 떠는 정치인, 통일이 가져올 이익에 솔깃해 하는 자들은, 통일 후의 상황들에 대해서는 어느 수준까지 숙고들을 했으려나.

 

 

[6]

 

(p.229) 어릴 적 그렇게 컸던 학교 운동장이 나이가 들어 찾아가보면 그렇게 작을 수가 없다. 그 넓었던 집 앞 ‘신작로’가 그렇게 좁을 수가 없다. 내 몸을 기준으로 보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의 작은 몸으로 본 세상은 크고 놀라웠다. 호기심에 가득 차 세상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성인의 몸을 기준으로 보면 죄다 시시하고, 볼품없다.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 문제는 시선의 높이. 해서, 쪼그려 앉는 순간, 어릴 적 광경이 눈앞에 다시 펼쳐진다.

 

 

[7]

 

(p.247) ‘지난 오십 년’은 밀려 살았으니, ‘앞으로의 오십 년’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교수를 그만둔 지 벌써 팔 년째입니다.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으나,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게 지상 과제인 나라에서 이런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김정운은 가히 위인이라 칭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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