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구루. 2018.5.3 초판 1쇄. 2018.8.15 초판 4쇄
[1]
(p.62) 말은 우리 유전자 속에 프로그래밍된, 타고난 능력입니다. 반면 글 읽기는 타고난 능력이 아닙니다. 글은 인위적으로 배워야만 익힐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현생 인류가 등장한 것이 20만 년 전인데 문자가 만들어진 것은 기껏해야 6천 년 전의 일이니까요.
우리 뇌에는 읽기를 관장하는 영역이 따로 없기 때문에 글을 읽으려면 뇌의 여러 부위가 축구 경기를 하듯 팀플레이를 펼쳐야 합니다. 후두엽은 눈으로 받아들인 시각 정보를 측두엽에게 패스합니다. 측두엽은 시각 정보를 재빨리 표음 해독합니다. ‘사람’이라는 글자를 사람이라고 읽는 식으로 말입니다. 측두엽으로부터 해독한 글자를 넘겨받은 전두엽은 그 글자의 의미를 추론합니다. ‘사람’이라는 글자와 실제 사람을 연결짓습니다. 다음은 이렇게 해독한 단어들을 연결합니다. 비로소 ‘그 사람의 손가락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큰 상처가 있었다’라는 문장을 이해하게 됩니다. 뒤이어 감정을 관장하는 변연계가 ‘아프겠다’, ‘안됐다’는 식의 감상을 내놓습니다.
이 문장을 읽은 나의 뇌도 저자가 설명한 내용과 똑같은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이 대목에 대한 내 변연계의 감상평은 ‘어우야~’.
[2]
(p.99) 스토리텔링 형식의 지식도서는 이야기책과 지식책의 특성을 모두 갖다 보니 상관없는 줄거리에 지식을 버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물을 찾으러 떠났다가 화산에 대해 알게 되는 식이죠. 이렇게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다 보니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재미가 없고 지식은 지식대로 다루기 힘듭니다.
스토리텔링 혹은 노래를 개사해 지식을 주입하려 드는 행태에는 반감이 절로 든다.
지식이라 이를 정도면 그 자체로 의미와 가치를 가져 마땅한데 스토리텔링이란 것은 아무래도 알맹이는 팽개치고 허저분한 껍데기만 챙기는 모양새.
어느 슬기로운 선조님이 서양인들에게 호숫가 비탈진 곳에 병원을 지으라 조언한 데서 영어 낱말인 호스피탈이 유래했다는 이야기는 우스개는 될지언정 영어 단어 암기의 수단으로 작정하고 삼기에는 아무래도 마뜩잖다.
[3]
(p.218) 언어능력이 멘탈의 필수조건은 아닐지 몰라도 멘탈의 충분조건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언어능력은 이치에 맞게 꼼꼼하게 따져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해서 질 높은 사춘기를 보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주장의 한 대목.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 문장에서, 문예창작학과 출신인 저자는 수학용어를 애매하게 가져다 썼다.
저자는 일상어인 ‘필수 조건’을 수학용어인 충분조건과 대비시키고 있는데, 수학에서 충분조건과 짝을 이루는 낱말은 필요조건.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충분조건과 필요조건을 각각 ‘어떤 명제가 성립하는 데 충분한 조건’과 ‘어떤 명제가 성립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라 하나마나한 설명을 늘어놓고 있는데, 요컨대 충분조건이란 그 전제만으로 결론이 자명하다는 것이요, 필요조건이란 적어도 그 전제 안에서 결론이 참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일상에서, 그 조건이 전제되지 않으면 어떤 결론이 성사되기 어렵다는 뜻으로 쓰이는 ‘필수 조건’이란 낱말은 충분조건과 대비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유의어에 가깝다.
한마디로, 부족한 어휘로 문장의 밀도를 높이려다 사달이 난 것. 그저 ‘언어능력이 멘탈에 필수는 아닐지라도 멘탈에 도움이 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라고 썼어야 옳다.
[4]
(p.240) 교과서는 지식을 전달하기에 좋은 도구가 아닙니다. 적은 분량 안에 너무 많은 지식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교과서는 온전한 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지식 가이드북 혹은 지식 카탈로그에 가깝습니다. ‘그 나이에 알아야 할 지식에는 이런 게 있다’라고 알려주는 역할이죠.
비어 있는 부분은 아마도 교사의 몫. 그러나 애당초 풍부한 서술을 담은 교과서를 만들면 되지 않겠나.
짐작컨대 돈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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