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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220.불교

223 [법정]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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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2002.10.22 초판 1쇄.

 

 

[1]

 

악마가 말했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로 말미암아 기뻐한다. 사람들은 집착으로 기쁨을 삼는다. 그러니 집착할 데가 없는 사람은 기뻐할 건덕지도 없으리라.”
       스승은 대답하셨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말미암아 근심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걱정한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

집착. 모든 번뇌의 원흉. 집착은 마침내 근심이 된다. 집착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

       해결책은 간단명료. 집착을 내려놓는 것. 다만, 근심과 즐거움은 동전의 양면이라, 집착을 내려놓을 때, 인생의 즐거움도 함께 내려놓아야 한다.

 

 

[2]

 

19세기 이전의 지식들은 진실이라기보다는 사상에 가깝다. 종교라 해서 예외일 리 없다.

       번뇌를 대하는 태도는 불교가 기독교보다 좀 더 냉엄한데, 번뇌에 시달리는 수많은 목사들이 끊임없이 종교의 무력함을 온몸으로 입증하는 중.

 

 

[3]

 

부모 자식 사이라 할지라도 어떤 인연에 따라 만나서 함께 살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마는 것이 이 세상의 도리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으로 다져져 있다면 너무 기뻐할 것도 없고, 너무 속상해 할 것도 없다.

나름의 속사정이야 왜 없겠나마는, 교회의 세습을 둘러 싼 잡음이 끊이지 않는 것은, 분명 천박한 것.

 

 

[4]

 

누가 귀에 거슬리는 비난을 하건 달콤한 칭찬을 하건, 그건 엄밀한 의미에서 나와는 상관이 없다. 누가 내 삶을 대신할 수 있는가. 지나가는 한때의 ‘바람’임을 알아야 한다.

본시 타자의 욕망을 사는 인간 본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조언.

       해탈이란 게, 참 쉽잖다.

 

 

[5]

 

몸이나 생명에 대해서도 바라는 것이 없는데, 하물며 자기 이익과 존경이나 명예에 대해서이겠는가.

경지란 바론 이런 것.

       이런 경지를 좇거나 이룬 분들은 대개 소리 없이 지낸다. 해서, 늘상 들려오는 것은 하찮은 조무래기들의 잡스러운 소란뿐.

 

 

[6]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내라. 온 세계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를 행하라. 위아래로 또는 옆으로 자비를 행하라. 서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서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가지라.

종교와 속세의 결탁이 시작되는 지점. 때묻은 종교인의 서식처.

       탁월한 세속적 통찰력을 선보인 버나드 쇼는 사람이 먹고 사는 방법은 노동, 구걸, 도둑질 딱 셋뿐이라 일갈했는데, 온 세계에 대해 한량없는 자비를 행하라는 조언은, 혹시 속세와 인연을 끊은 종교가 먹고사니즘의 방편이 마땅찮다 보니, 자비를 핑계 삼아 속세에 줄을 대려는 수작인 것은 아닌지.

 

 

[7]

 

누구나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이 사람과 일생을 함께 대화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해봐야 한다. 결혼생활에서 그 외의 것은 다 무상하기 때문이다.

법정도 그렇고 법륜도 그렇고, 아무래도 반외팔목이 진리기는 진리인 모양.

 

 

[8]

 

한평생을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 끌려가는 삶이 있다면, 그것은 불행한 인생이다. 적어도 자기 인생만은 자주적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일체유심조보다는, 유수부쟁선.

 

 

[9]

 

조금은 외로울지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외로움은 자기 자신을 맑히는 일이기도 하다.

공지영이 책 제목으로 가져다 쓰면서 유명해진 구절.

       ‘맑히다’라는 낱말은 심히 낯설다.

       우리말은 형용사에 사동 접사를 붙여 사동사로 만들어 쓰는데, 예를 들면 높이다나 낮추다 따위가 그런 낱말의 하나. 그러고 보니 높다와 낮다도 형용사였던 것.

 

 

[10]

 

자신과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땀흘려 애써 일하는 입장에서 보면, 놀고 먹는 무리들이 어쩌면 사회의 기생충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다 하나같이 생산직에만 종사한다면 그 사회는 조화를 잃고 한쪽으로 치우쳐 병들고 말 것이다.

속세에 빌어 먹는 종교를 변호하려 이후로도 구질구질한 사족을 잔뜩 달았으나, 부질없는 짓이다.

       속세는 집착과 번뇌의 용광로요, 해서, 부처는 이런 세상에 다시 안 태어난다고 했다. 다시 태어나면 뭔가 업보가 남아 벌을 받는 것이라면서.

       깨달았으면, 속세에 대한 미련을 결연히 끊고, 해탈을 꿈꾸어야 마땅히 옳다.

       다만 버나드 쇼의 통찰한 바와 같이 입에 풀칠을 하는 수단이 노동, 구걸, 도둑질 셋뿐이니, 해서, 구걸의 삶을 이어갈 수는 있겠으나, 그런 삶을 구구절절 변명하고 나서는 짓은 구차하기 짝이 없다.

 

 

[11]

 

기독교의 사랑은 어디까지나 인간 본위다. 그래서 소나 개, 돼지, 노루나 사슴, 토끼 같은 짐승은 모두 사람들에게 잡아먹히라고 하나님이 만들어냈다고 한다. 소나 개한테 가서 그런 사실을 확인할 것도 없이 유목 사회에서 나옴직한 가설이다. 그러나 불교를 비롯한 동양의 자비는 인간 본위가 아니라 생명 본위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생명의 큰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거나 괴롭히지 말라고 한다.

사람들에게 잡아먹히라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짐승의 예를 들면서, 마침 개를, 돼지보다 앞서, 두 번째로 꼽은 것은, 어떤 의도가 담긴 것이라 할 수 있을지.

 

 

[12]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 처서를 지나더니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선득거리고 풀벌레며 귀뚜라미가 계절의 변화를 노래하고 있다. 이제는 여름에 내렸던 발을 거두고 하루 이틀 걸러 군불도 지펴야 하는 그런 계절이 되었다. 어느새 하늘도 높아지고 별자리도 한층 또렷해졌다.

이런 시절을 살다 간 사람들이 정말이지 부럽다.

 

 

[13]

 

경전을 책장에 꽂아두거나 선반에 모셔놓기만 한다면 그것은 한낱 소유의 더미에 지나지 않는다. 소유는 잡다한 짐이다. 잡다한 짐에서는 빛이 발하지 않는다.

벽면을 가득 메운 책장에 문득 눈길이 머문다. 모조리 짐이구나. 몽땅 내다 버렸다.

       잡다한 일상을 벗어나려 나름 몸부림치는데, 좀체 쉽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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