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2011.3.10 초판 1쇄.
[1]
원고를 만지던 중 장모님이 돌아가셨다. 부처님처럼, 기쁜 일은 적고, 슬프고 억울한 일이 많은 세상을 묵묵히 견디며, 지상에서 해야 할 일을 완성하고 가셨다. 문득, 서방정토, 그 편안 쾌적한 곳에서, 돋보기를 꺼내들고, 앉아, 반쯤 몸을 기울인 평소의 자세대로, 이 책을 읽고 계신 모습이 언뜻 떠올랐다 사라졌다. 아내의 그리움과 기억만으로도 장모님은 극락에 왕생해 계시다. 틀림없다.
‘아내의 그리움과 기억만으로도 장모님은 극락에 왕생해 계시다’는 대목은 스와힐리어 ‘사사’와 ‘자마니’의 개념 체계를 사뭇 닮았다. 파랑새 이야기에서도 얼핏 본 듯. 사람 생각이란 게 다들 어슷비슷.
[2]
경전은 진실의 그림자, 즉 경험을 지시해주기는 하나, 정작 그 경험을 보장해주지는 않는 것이다. 말씀은 ‘우는 아이 달래는 종이돈’일 뿐, 그것으로는 눈깔사탕 하나 사먹을 수 없다. 지식은 경험으로 확인되어야 생명력을 얻는다. 보지도 않고 믿는 것은 앵무새거나 마군이다. 경험을 떠난 소외된 지식은 도그마가 되고 권력이 되어 나와 남을 망친다. 그 비극은 종교의 역사가 보편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명박의 악행이야 여럿 있겠으나, 그중에서도 ‘내가 해 봐서 아는데’를 희화화시킨 공로가 아마도 으뜸.
[3]
돈오는 쉬운데 정말 점수가 어렵습니다. 불교의 이치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되, 그 이치를 진정 믿기가 어렵고, 또한 그 가르침대로 살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대체 어떤 가르침대로 살라고 교인들에게 설파하고 있길래, 넷 중 하나가 교인이라는 종교가 방방곡곡 성전을 쌓아올리는데도 이 나라는 이리도 각박한지. 목사라는 자들의 입에서 가르침이라 부를 만한 게 나오기는 하는지.
[4]
아리스토텔레스는 ‘속한다’가 객관 세계의 자연스런 속성이라고 했습니다만, 불교는 이런 말에 터무니없어합니다.
객관 세계까지야 모르겠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바나 출신 영장류의 속성은 정확히 꿰뚫어 본 것. 불교 쪽의 기대가 과한 것이다.
불교는 밖을 향한 습관적 쇳소리를 그만 그치고, 문제를 자신 속에서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합니다.
불교는 분명 떼지어 살던 본능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하기사 이쯤은 되어야 진정 진화라 부를 만하기는 하다.
종교와 종교인을 혼동해서는 아니 되겠으나, 팔십 살 목사가 제 연봉을 바득바득 챙기려 드는, 이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짓은 치사스럽고 복 못 받는 짓이라 떠들어대는 현대 기독교란 누가 뭐래도 본능에 충실한, 참 단순깜찍한 종교.
공空이란 ‘자기 이해와 관심’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합니다. 공이 무아無我와 동의어라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5]
세워도 얻는 것이 없고, 부수어도 잃는 것이 없다.
현대 과학은 철학에 가까워서, 사십 억 지구 역사 이래 그 어떤 물질도 지구에 덧대지거나 지구를 벗어난 적이 없다는 생각에 문득 닿으면, 나 역시 그런 물질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 태고의 지구에도 내가 있었고 태양이 폭발한다는 먼 훗날까지도 지구에 매인 운명이라는 것을, 해서 아득한 세월을 티끌 같은 원소가 되어 표류할 운명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백사십억 년 우주의 나이와 질량-에너지 등가 개념에 담긴 현실이란, 어찌나 서늘한지.
[6]
더구나 인간은 자신의 욕망마저 자신이 선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개인의 의지와 행동이 권력과 산업, 매스컴에 의해 조장되고 조정되는 시절이 있었던가요.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곳곳에 감시카메라와 눈만 뜨면 광고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만들어놓은 거대한 환상의 비현실 속에서 추상적으로 타율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그러면서도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흡사, 스피노자가 비유한 것처럼, 돌멩이가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하늘을 날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소확행!
[7]
인간이 생물학적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주 적은 양’이 필요하고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다지 힘들여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류 역사래야 기껏 십수만 년. 문명이래야 고작 몇 천 년. 생명의 원리를 보란듯이 거스르는 이성이란 참 알 수 없는 기재. 생명 진화의 영문 모를 방향성.
평안하고 자유로운 삶은, 없어도 살 수 있는 것들을 멀리 하는 데서부터.
[8]
서생들이란 본시 쥐꼬리만큼 아는 것 가지고 잘난 척을 하다가도, 모르는 질문이 나오면 괜히 신경질을 내는 좁쌀들입니다.
괜히 공자까지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를 읊고 나섰겠는가.
[9]
‘세계’는 자아의 중력에 의해 휘어져 있습니다.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이 불교 이해의 관건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관심과 욕구, 주장, 그리고 지배와 권력의 의지를 통해, 주변을 이해하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놓고 있는데, 이 ‘주관적 환상’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세계라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일체유심조라는 구절은, 수험생이나 난관에 부닥친 사람들이 흔히들 언급하듯, 세상사 모두 마음먹기 달렸노라, 해서, 마음만 다잡으면 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관적 세계의 형성이 불행의 시발이요, 마음이란 그 불행의 원천. 일체유심조의 ‘심’이란 다름 아닌 그것.
[10]
공포의 바닥에는 욕망이 있습니다. 자기 보존의 뿌리 깊은 욕망이 없다면 우리는 공포나 두려움을 느낄 이유가 없겠지요.
두 문장 사이의 골이, 깊고도 깊다.
[11]
제발 공空을 설하면서 물리학에서 말하는 아원자 세계의 내부 공간의 휑한 공간 운운하는 논법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말씀은 불교의 적절한 이해를 심각하게 그르칩니다. 불교가 공空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실재하지 않는다’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객관적 세계는 거기 그렇게 역력하게 존재합니다. 불교는 다만 그것이 자아의 투사로 물든 주관적 세계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할 뿐입니다. 이 구분을 절대로 놓아서는 안 됩니다.
공空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물리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空이란 자기 이해와 관심의 탈각을 뜻합니다. 공空은 세계에 개입하는 주관적 태도, 바로 그것을 문제 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제발 공空을 이해시키겠다면서 현대물리학의 성과를 끌어들여 아원자 세계의 빈 공간이니 쿼크니 하는 어법을 삼가주셨으면 합니다. 공空은 무아無我와 동의어라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희한한 대목.
한쪽은 진리요, 다른쪽은 진실. 양쪽 모두 옳은데, 뭐 굳이 섞을 것까지야.
[12]
닭이나 소는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지요. 국가를 지배하는 군주가 있다고 해서, 우주를 지배하는 특정한 인격이 꼭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스피노자는 만일 삼각형이 생각할 줄 안다면, 그는 틀림없이 신을 삼각형으로 그릴 것이라고 시니컬하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주관적 세계관. 스피노자가 ‘세모 신’을 말할 때 ‘안 시니컬’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그 앞에만 서면 왠지 쫄고 오그라드는 신에 대한 멘션인지라 이 말을 인용한 사람들이 시니컬이라는 우산 속에 - 스피노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릎을 칠 만한 생각을 알려준 스피노자를 - 숨겨주려 한 건지도. 맞서 대면하면 쫄리는 것들. 신도 그렇고, 죽음도 그렇고, 4층도 그렇고, 빨간색 펜으로 이름 쓰는 것도 그렇고.
원시 불안의, 짜증스런 찌꺼기들.
[13]
‘내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리라'라는 기필期必을 거두십시오.
연이란 깊고도 깊은 것이니. 헤아리려 말고 굳이 애쓰려거든 그 목표가 벗어남에 있어야.
음, 아니다. Just let it go.
[14]
우리는 사물과 세계를 두고, 태어난다거나 사라진다고 말할 수 없다. 그곳은 깨끗하다거나 더럽다는 인간적 흔적을 덧붙일 수도 없고, 늘어난다거나 줄어든다는 세속적 득실도 운위할 수 없다. 자아의 개입이 근원적으로 차단된 곳이기에, 거기 사람과 자연은 구분되지 않으며, 주체와 대상 또한 분리될 수 없고, 바라보는 시선과 거기 잡히는 풍경도 둘이 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인간에게는 원초적 무지가 있다는 것도 생뚱맞고,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권유도 쓸데없다. 늙고 죽음의 개념도 없으니, 그 늙고 죽음을 초월할 수도 없지 않은가. 생로병사가 도무지 없는 판에, 붓다가 초월과 해방의 방법으로 가르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또한 뜬금없는 소리이다. 기억하라, 요컨대 깨달음이란 것도 농담이니, 더구나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는 더더욱 황당하다는 것을.
저자가 파격적으로 번역했다는 <반야심경> 한 대목은, 문장은 밋밋해도, 분명 생각의 본원을 드러낸다.
빅뱅.
모든 사물이 한날 한시에 나서 서로 다른 형상으로 지금을 살아간다. 혹은 무생물로 혹은 생물로.
지구 위 생물 한 종이 멸종한다고, 혹은 지구의 모든 생물이 멸종하거나, 지구 자체가 사라지더라도 계속 흘러갈 시간에서, 윤회라는 생각은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덧붙여, 마지막 대목에 등장한 ‘농담’은, 책의 제목을 두고, 조심스레 ‘재미’를 기대했던 내게, 그런 부류의 재미 같은 건 이 책에 없다고 땅땅 선언 중.
[15]
공空이 무아無我라서 색과 공이 공존할 수 있습니다. 서로 범주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방해받지 않으면서 나란히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색즉시공’에 대한 설명이라 여겼는데, 다시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색즉시공은 색과 공이, 공존에서 나아가, 일체가 되는 것.
[16]
매사 자연스러운 것이 좋지요. 주인된 사람은 손님이 차를 의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차 맛을 알기 위해서도 그렇고, 마음을 나누는 데도 그렇습니다. 주인이 다도를 운운하며 까다롭게 따지면, 차 맛이 저만큼 달아나버립니다. 차가 얼마나 귀한 것이냐든가,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다든가, 찻값의 고하를 들먹이기 시작하면 차가 묵직하게 가슴에 걸려 넘어가지 않습니다. 차의 이력을 줄줄이 꿰며, 옛적 다인들의 행적을 늘어놓으면, 차 맛을 느껴야 할 신경이 귀로 이동해버립니다.
핑거볼의 물을 마셨다던, 영국의 엘리자베스의 마음이 아마도 이런 것.
[17]
우리는 법계의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고, 조각을 하며 장난치고 놀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그 놀이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유의하십시오. 친구의 성을 빼앗기에 여념이 없던 아이들도, 해질 무렵 어머니가 부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기 모래성을 짓밟고, 저녁을 먹으러 달려가지 않습니까.
놀 때는 맹렬히 노는 것이 마땅히 옳겠으나, 부질없고 부질없음이야.
[18]
단하는 춥다고 법당의 목불을 도끼로 쪼개 캠프파이어를 해버렸습니다. 놀란 주지가 억장이 막혀 발을 구르자 태연히, “우리 부처님 사리가 얼마나 나오는지 궁금해서…”라면서 재를 뒤적였습니다. 목불에 무슨 사리냐고 어이없어하자, 단하는 “사리가 없다면 부처님이 아니지”라며 쏘아붙였습니다.
처음에는 인상깊으나 돌아보니 단순하더라.
초자연적 실재란 없고, 초월적 깨달음이란 것도 헛소리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실제를 아무런 두려움이나 공포 없이, 욕망의 흔적과 조바심 없이 관觀할 수 있을 때, 그곳이 곧 구원이고 법계 입니다. 진리란 피곤하면 눕고 졸리면 자는 것일 뿐, 이 밖에 무슨 특별한 소식은 없습니다. 오늘 지은 업이 마음의 창고에 아무런 찌꺼기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또 내일 다가올 일을 걱정하지도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다름 아닌 부처입니다.
도道는 굳이 닦아 익힐 필요가 없다. 다만 오염시키지만 않으면 된다. 무엇을 오염이라 하는가. 생사를 의식하여 조작하고 선택하는 일체가 그것이다. 도와 곧바로 만나고 싶은가.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이니라. 무엇을 일러 평상심이라 하는가. 인위적 조작과 주관적 가치판단이 없고, 의도적 선택이 없는 것, 사물에 대한 고착이나 방기가 없고, 진리에 대한 환상도 없는 바로 그곳을 가리킨다. 경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범부의 행도 아니고 성인의 행도 아닌 것. 그것이 보살행이라고. 다만 이렇게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것, 상황에 따라 응접해나가는 것이 바로 도이고 그 세계가 바로 법계이다.
[19]
두 손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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