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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330.사회학

330 [김규항]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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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 2010.3.27 초판 1쇄.

 

 

[1]

 

몇 백 년 전 유럽 사람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우리와 같은 인간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그래도 사람을 죽이려니 일말의 양심은 있었나 보다. 그런데 결론은 같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그들은 대량 학살의 길을 택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 당시 그렇게 죽어갔다.

첫째는 서구의 미개함. 둘째는 “우리와 같은”이라고 태평하게 쓰고 있는 지승호의 아둔함.

       지승호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후손이었다면 ‘아메리카 원주민이 우리와 같은 인간인지를’ 같은 표현은 아예 떠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표현은 딱 그만큼 쓰레기.

 

 

[2]

 

인생에 대단한 의미를 두고, 더 밝은 미래를 위해 늘 열심히 노력하고, 하여튼 좀 공격적으로 살아가는 걸 미덕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그게 바로 인생을 끊임없이 고단하게 만듭니다. 만날 ‘보다 나은 미래’만 생각하지 ‘오늘’이 없어요. 인생은 오늘의 연속이잖아요.

이 쉬운 얘기가 거듭 반복된다. 각자의 미래를 개인 스스로가 오롯이 떠안아야하는 사회인 탓이다. 단 한번이라도 삐끗하는 순간 끝장나는 환경 때문이기도 하고.

 

 

[3]

 

종교적이라는 것과 종교는 다른 것입니다. 실재하는 종교는 그다지 종교적이지 않아요. 전부 그런 건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 그렇죠.

말장난. ‘종교적’이라는 낱말은 문자 그대로 ‘종교에서 풍기는’이라는 의미여야 마땅히 옳다.

       딱히 밥벌이할 능력이 없는 종교인들이 세속의 욕구에 무릎 꿇는 것이 문제의 원인. 속세와 종교를 잇는 평신도들의 존재는 구조적 문제.

       사상의 실현이란 게 짐작컨대 그 정도.

 

 

[4]

 

사람의 약점 가운데 하나가 익숙해지는 습성이죠. 느끼지 못하게 되는 거니까요. 그러니 옛날 이근안 같은 사람이 업무상 고문을 하면서도 선량한 아빠 노릇, 교회 집사 노릇하는 게 가능했던 거죠. 심성이 여린 사람들은 미쳐버리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보다는 대개는 익숙해지죠. 사람은 참 위험한 동물이에요.

무심한 일상이 풍요롭게 이루어지는 세상은 꿈일 뿐인지.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쳐 날뛰는 족속들이 발광을 멈추는 것만으로도 족하디 족하련만.

       공동체를 떠들던 자들의 일원이 공직에서 물러 나면서 세를 받겠답시고 목돈을 대출 받아 상가건물을 사는 나라에 뭘 기대하겠나마는.

 

 

[5]

 

나와의 차이가 내 관리 영역 안에 있다고 생각되면 신선하고 좋게 보이지만 내 관리 영역을 벗어났다고 생각되면 마땅치 않아 보이는 거죠.

흔히 말하는 ‘선’. 봉준호가 ‘기생충’에서 박사장을 통해 말하려던 바로 그것.

       태평하게 넘나드는 자들도 문제고, 감내를 힘겨워하는 자들도 문제고.

 

 

[6]

 

좌파적 세계관은 세상을 민족이나 국가가 아니라 계급으로 나누어 보는 데서 출발합니다. 대기업 회장과 내 아버지가 어떻게 동족이냐, 이런 문제의식을 좌파적인 문제의식이라 볼 수 있죠. 반면에 우파적 관점은 시종일관 세상을 민족이나 국가로 나누어 보게 합니다. 그래야 한 사회에서 계급간의 착취와 모순이 은폐되니까요.

편파적 문장. 세계관과 관점은 무게가 다르다. 좌파쪽에는 문제의식이라는 수식을, 우파쪽에는 은폐라는 낱말을 덧씌운 것도 치졸한 짓이고. 좌파적 세계관이라고 단점이 없겠나.

 

계급이라는 것은 방식이나 관점이 아니라 그냥 사실이라는 것이고, 더 이상 계급을 말하지 않는다는 건 더 이상 현실을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틀린 말은 아니나, ‘계급’이라는 낱말이 도무지 마음에 들질 않는다. 이익 간의 충돌을 적절히 서술하는 낱말인지도 확실치 않고. 좀 더 적절한 낱말이 분명 있었을 듯싶은데.

 

 

[7]

 

인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외국인 제국주의자들에게 당하든, 내국인 지배 체제에 당하든, 그 차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전복의 가능성에서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인민들이 제국주의를 탄핵할 수 있겠나.

 

 

[8]

 

중요한 건 사회 성원들의 지배적인 가치관이 무엇인가, 하는 거죠.

이 나라는 이게 숨겨져 있다. 짐작컨대 ‘부富’인데, 하도 유치하고 치졸한지라, 민낯을 드러낼 가능성은 도무지 크잖다.

 

 

[9]

 

원래 사회라는 것은 시인이나 예술가가 시대의 전위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비평가나 지식인들이 그것을 통해 사회를 분석한 다음, 정치가나 관료 그리고 지배층들이 거기에 대한 답을 내놓으면서 변화를 이룬다.

망상 속 이야기. 일상을 지내는 이들이 세상을 면면히 바꿔나가는 것. 대중의 인내가 그치는 지점이 세상의 변화가 태어나는 곳.

 

 

[10]

 

상상력과 유머가 죽은 사회에 미래는 없다.

뭘 이렇게까지. 심각이 과하네.

 

 

[11]

 

사실 당사자들에겐 사회적 억울함이 있겠죠. 그런데 그런 나름의 억울함이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얻으려면 더 못한 사람들의 문제를 염두에 두는 태도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내 억울함이나 내 손해만 호소하는 건 추악한 집단이기주의라고 할 수 있겠죠.

해서, ‘집값 하락 반대’로는 시위를 해서는 안 된다.

 

 

[12]

 

우리는 적과 싸울 생각만 했지, 우리가 만들 세상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대안 없는 반대가 힘을 잃는 지점. 대안이 설 때까지 현실을 감내하기도 그렇고, 딱히 대안을 내놓을 능력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나름 골치 좀 아플 듯.

       드높은 포부와 이상에 터잡은 인사가 제도권에 진출하자마자 우뚝 멈춰서는 지점이기도 해서, “알고 보니 현실이 그리 단순치가 않더라구요” 따위의 변명을 늘어놓는 배경이기도 하다.

 

 

[13]

 

인터뷰어가 팔십 대 해녀할머니에게 물어요. “할머니, 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훨씬 편하시잖아요?” “그럼 편하지. 혼자서 100명 몫은 하지.” “그런데 왜 안 쓰세요? 힘드신데.” 그러니까 할머니가 대답하길 “내가 그걸 쓰면 나머지 99명은 어떻게 살라고?”

그런 배려 없이도 나머지 99명이 잘 사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몇몇 미꾸라지가 물을 흐릴 게 뻔한, 하향평준화는 권할 게 못 된다. 사회과학 분야의 여러 연구 결과들이 드러내듯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그런 상황을 유지하거나 감내할 깜도 못 되고. 괜히 팃포탯이 최적의 전략이겠나.

 

 

[14]

 

유머라는 건 말이죠. 적어도 두 가지 중 하나는 충족시켜야 해요. 웃기든지, 사회에 유익하든지.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은 두 번째 역할을 과하게 의식하다가 스텝이 제대로 꼬였다. 유익의 원천이 얼마나 드물면, 유머에서 유익을 찾고 앉았을까.

 

 

[15]

 

왜 우리의 엘리트 기준은 우리가 욕하는 사람들의 엘리트 기준과 다르지 않죠?

민정수석 조국의 법무부장관 사퇴는 시사하는 바가 나름 적잖다.

 

 

[16]

 

대담집은, 어딘가 대강 둘러대고 고민도 얕다는 인상을 떨치기가 어렵다. 대화를 날 것 그대로 옮겨 적은 글에서 탄탄한 조리나 깊은 생각을 찾기도 쉽잖다. 억측이겠으나, 치열한 글쓰기를 회피하는 게으름은 아닐지.

       깊게 고심하고, 조리를 세워, 세심히 글로 옮기는 것이 바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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