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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410.수학

410 [앤드류 해커] 수학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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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엠앤비. 2019.3.11 초판 1쇄. 원제는 "The Math Myth and other STEM delusions".

 

 

[1]

 

(p.19) 산수는 늘 필수 과목이었고, 여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브루클린 세인트앤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며 수학 교사로서 드높은 명성을 자랑하는 폴 록하트는 이렇게 말한다. "특정 과목을 의무 교과과정으로 편입하는 것만큼 열정과 흥미를 반감시키는 방법도 없습니다."
       대학교수인 내가 학교에서 개설한 강의는 대부분 선택과목이기에 뚱한 예비군 같은 학생들 모습을 볼 일이 없다. 하지만 필수 과목에 탈출을 허용하는 순간, 과학, 문학, 역사, 체육을 포기하려는 학생이 속출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저자는 학생들의 수업 태도를 문제삼는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과목은 의지를 가지고 수업에 참여하지만 필수과목은 뚱한 예비군의 모습으로 수강하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저자가 인용한 폴 록하트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저 말을 했다. 언급된 책은 <A Mathematician's Lament>. 우리나라에는 <수포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제목으로 번역서가 나왔다. 인용된 대목은 이것:

 

(p.38) 어떤 과목에 대한 열정과 흥미를 잃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학교 교육 과정의 필수 과목으로 채택하는 것이다. 표준화한 시험의 주요 과목에 포함되기만 하면, 기성 교육 체제가 그 과목의 생명력을 모두 앗아가 버릴 게 분명하다.

- 폴 록하트, <수포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폴 록하트가 문제 삼은 것은 학생들의 태도가 아닌 ‘표준화한 시험’.

       필수과목으로 채택되는 순간 공정한 평가라는 잣대가 무엇보다 중요해지고, 틀에 박힌 시험 구조가 해당 교과목의 생명력을 앗아간다는 것이다.

       수학이라는 학문이 시험이라는 제도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야 두 말하면 잔소리.

       정치학부 교수인 저자는 학교에서 순수 수학 대신 실용 수학을 다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 폴 록하트의 해법이 훨씬 간명하다.

 

(p.39) 수학 교육 과정은 개혁이 필요하지 않다. 폐기가 필요할 뿐이다. 수학의 어떤 ‘단원들’을 어떤 순서로 가르쳐야 할지, 이 기호 체계 대신에 저 기호 체계를 써야 할지, 어느 회사에서 나온 어느 모델의 계산기를 써야 할지 따위를 둘러싼 이 모든 야단법석은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갑판 의자들을 재배치하는 꼴이랄까! 그깟 게 뭐 대수인가. 맘대로 수술하시죠, 의사 선생님. 당신의 환자는 이미 죽었으니까요.

- 폴 록하트, <수포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수학계가 제 밥그릇 챙기기에만 혈안이 된 게 아니라면, 그들의 말마따나 4차산업혁명이니 지능정보사회니 하는 현대 사회에서 수학적 소양이 그리도 중요하다면, 일단 입시과목에서 수학을 제외시키는 일에 발벗고 앞장서는 게 옳다.

 

 

[2]

 

(p.29) 러커스 대학교 수학과 교수 조셉 로젠슈타인은 모든 사람을 상대로 특정한 관념을 주입하는 근거가 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복소수, 유리수 지수, 일차부등식, 역함수가 모든 학생에게 필요하다는 주장은 어떤 근거에서 하는 건가요? 당신에게 인수분해가 마지막으로 필요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수학을 왜 공부해야 하나요?” 부류의 단골 소재.

       그러게, 시장에서 거스름돈만 셈할 줄 알면 되는데, 게다가 이제는 카드결제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해서 그나마 거스름돈을 계산할 일조차 좀처럼 없는데, 골치 아픈 수학을 왜 공부하고 앉았을까.

       이 사안은 그저 “당신에게 인수분해가 마지막으로 필요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정도의 질문으로 정리될 만한 수준이 아니다.

       학교의 역할, 공동체의 목표, 인류의 미래 등에 닿아있는 만만찮은 주제. 다들 먹고사느라 바빠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따름.

 

 

[3]

 

(p.30) 콜린 오펜자토는 브루클린에 있는 자기 아파트에서 개인 과외를 한다. 그녀는 과외 시간의 대부분을 수학 자체보다는 ‘수학 시험의 구조와 시험을 잘 치는 기술’을 설명하는 데 소비한다고 고백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거꾸로 풀기’라는 기술이 있다. 학생들은 실제로 문제를 풀기보다 편법을 찾기 시작한다.

객관식 시험에서 문제에 주어진 식에 보기의 값들을 대입해 조건을 만족하는 답을 찾는 것이 ‘거꾸로 풀기’의 한 예. 이런 비판이 정당하려면 시험의 구조부터 정상이고 봐야 한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공교육의 시험 구조가 제대로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p.49) 1979년 11월 7일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예비고사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50분 동안에 스물다섯 문제를 풀어야 했다. 이건 솔직히 수학이 아니라 그냥 암기과목이다. 아니다. 순발력 테스트일 수도 있다.

- 강석진, <수학의 유혹 2>

삼십 년이 지난 지금, 대학 입시는 100분에 서른 문제를 푸는 걸로 형태가 바뀌었다. 문제당 1분 추가. 그럼 뭘 하나. 중요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내신 시험이 여전히 50분 동안에 20문제를 풀기를 요구하는데.

       컨닝을 한 것도 아닌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바른 길과 틀린 길이 따로 있을지. 어디까지가 기발한 발상이고 어디부터가 편법인 건지.

       학창시절 치렀던 IQ 검사 중에 여러 가지 색깔로 여러 가지 색깔 이름을 적어 두고 - 예를 들어, ‘파랑’이라는 글자가 노란색 글꼴로 적혀 있다 - 제한 시간 안에 색깔을 얼마나 많이 인식하는지 묻는 문제가 있었다. 문자와 색상이 만들어내는 혼동을 이겨내는 게 관건인 셈인데, 눈이 나빴던 나는 문득 안경을 벗고 풀면 글씨가 안 보이니 쉽게 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IQ 검사는 대개 한 종류의 문제를 풀고 잠시 기다렸다가 다음 문제를 푸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그 문제 풀이를 시작하라는 신호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교실 여기저기서 안경을 벗어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구나 하고 말았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시력이 나쁜 학생들이 사실상 '거꾸로 풀기'를 감행한 셈인지라, 안경을 쓰지 않은 학생은 이런 상황이 분명 분했을 것이다.

 

 

[4]

 

(p.46) 경제학원론에 배운 바를 떠올려야 한다. 사람들이 바라는 급료를 감당할 정도의 돈을 벌 수 있어야 그 분야에서 새로운 직업이 등장하는 법이다. 사기업은 고용한 근로자가 영업이익을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해야 기업의 문을 연다. 정부와 비영리 기관은 세금이나 기타 자원을 통해 재원을 마련할 수 있어야 공무원을 채용한다.

지극히 당연하고 당연하건만 나랏님들, 노동조합의 지도부, 공무원을 지망하는 취업준비생들이 이런 생각들을 하고는 있는지.

 

 

[5]

 

(p.90) 그리고리 페렐만은 우리 시대의 최고 수학자로 불린다. <뉴요커>에 실린 그에 대한 평판을 소개한다. “그는 늘, 아주, 정말 조심스럽게 문제를 검토했다. 그는 빠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학은 스피드에 의지하는 학문이 아니다.” 75초에 한 문제를 풀어야 하는 시험에서 그는 과연 몇 점을 받았을까?

저자가 순수수학과 학교수학을 혼동하기는 했다. 사실 책 전체에 걸쳐 순수수학과 실용수학이라는 실체에 대한 오해가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수학이란, 속도를 다투는 학문이 아니다. 저자의 기대와는 다른 듯하나 나는 매번 같은 결론에 이른다: 입시과목에서 수학을 빼자!

 

 

[6]

 

(p.168) 명문 대학의 수학자 집단은 끈기를 갖고 수학을 ‘주입’하려 한다. 그들은 지적 탐구와 학문의 대상으로 수학의 위상을 유지하고, 또 육성하려 든다.

이 나라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

 

 

[7]

 

(p.184) SAT 성적을 활용하는 이유가 있다. 유일하게 ‘능력’의 척도로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좋은지 나쁜지는 모르겠으나, 성인이 된 이후에는 한 개인을 이처럼 조밀하게 평가하는 수단은 없다. 금융 인력이나 외과 의사의 능력을 두 자리 숫자로 간단하게 측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학 교수 또한 마찬가지다. SAT 점수로 다시 돌아오면, 역사학과 지망생이 공대 지망생보다 "능력이 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17세에 받은 시험 결과가 10년 후의 업무 능력을 가리킨다고 말한다면 나가도 너무 나간 것이 아닐까?

앞부분은 착오. 성인 역시 어딘가에 혹은 누군가에 고용된 입장이라면 두 자리 숫자로 조밀하게 평가받는다. 흔히 말하는 ‘고과’라는 것. 대학교수가 직업인 저자는 명예 교수인 탓에 고과를 받은 지 오래된 모양. 뒷부분은 바른 소리.

 

 

[8]

 

(p.188) 내 친구들은 퀸스의 사립대학에서 강의하는 나에게 종종 이렇게 물어본다. “자네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우수한가?” 내 대답은 간단하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야지.”

교육자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내가 만나 본 이 나라 교육계 종사자 중에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없지는 않았으나, 다만 여건들이 만만치 않은 모양. 배우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이나 여튼 교육이 밥벌이와 직결되면 뭔가 복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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