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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2012.5.18 초판 1쇄.
[1]
르네 지라르의 말을 빌리면 “인간은 강렬하게 욕망하면서도, 무엇을 욕망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자크 라캉의 말을 덧대면 그 강렬한 욕망이란 것들조차 실상 ‘타자의 욕망’. 부질없기 짝이 없다.
[2]
침팬지와 나의 유사성을 받아들이는 순간, 침팬지보다 인간에 훨씬 가까운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5천 년 사색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것들은 삶이 뭔지 전혀 모르는 분위기.
[3]
세상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건 차가운 진실입니다. 그걸 알면 세상이 스산하게 느껴지죠. 그런데 그 진실이 주는 자유가 있습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반응에 일일이 신경쓸 필요는 없으니까요.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반응에 너무 민감할 필요가 없다는 진리를 만나는 거죠.
불교의 업보니 번뇌니 하는 것들을 일상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런 모습일 듯.
[4]
너 창의성이 뭔지 아니? 남과 다른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런데 창의성이 과학고에서 만들어질 것 같아? 전혀 아니야. 창의성이란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남과 다를 수 있는 용기’야.
그러게, 학교를 통해 기성 세대는 미래 세대에게 무엇을 전하려 하는 것인지. 현상만 두고 보면 인적자원의 변별이 학교라는 조직의 궁극적 존재 이유. 마침 그 인적자원의 보호자들도 학교의 그런 역할을 두 손 들고 환영 중.
[5]
우리를 얽매온 규범이라는 게 과연 얼마나 튼튼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은 심플.
규범 이야기를 길게 했는데, 요약하자면 딱 한마디입니다. “의심하라!” 근엄한 얼굴을 한 수많은 규범들이 오늘도 자기 존재의 근거로 온갖 이유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허세로 가득 찬 그 가면을 벗기는 작업은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기 위한 필수 과제입니다. 사랑과 연대의 공동체를 일구어내는 출발점은 바로 규범에 대한 의심입니다. 의심의 도움으로 쓸데없는 규범들이 사라지고 나면, 꼭 지켜야 할 규범은 오히려 힘을 얻습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의심이 규범을 무너뜨리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의심이야말로 규범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토대입니다.
그러니 동네 어귀에 현수막이나 내걸면서 우리 똘똘이가 알아서 잘 해주겠거니 하는 자세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바람직한 방법과는 거리가 멀다.
[6]
종교나 윤리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만, 최소한 법적으로는 인간에게 자기를 파괴할 권리가 있는 셈입니다. 어쩌면 자기를 파괴할 권리야말로 인간이 가장 마지막까지 쥐고 있는 존엄성의 증거일 수 있습니다.
의미 부여가 과하다. 다른 생명체들은 존엄성 따위 신경쓰지 않고서도 잘만 살아간다.
[7]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우리의 모든 행위가 사회적으로 유해할 수 있습니다. 밥을 너무 많이 먹는 것도 제3세계의 난민들을 생각하면 사회적으로 유해할 수 있고, 자녀를 낳지 않는 것도 국가생산력을 저하시킨다는 점에서 유해할 수 있으며, 우리가 먹고 싸는 일거수일투족이 후손들이 누릴 자연환경을 어느 정도 파괴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유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 유해성’을 끌고 들어올 때는 (사회 유해성과 처벌을 연결지을 때에는) 훨씬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 유해성’ 개념은 법의 가면을 쓰고 윤리나 도덕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개연성이 워낙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 어렵고 복잡할 이야긴가? 생태계의 관점에서 보면 지켜야 할 선은 대강 드러나 있다.
[8]
‘왜’가 아니라 ‘누가’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 논리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공동체란 일상이면서도 만만찮은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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