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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300.사회과학

304 [정재승] 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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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지식하우스. 2009.12.15 초판 1쇄.

 

 

[1]

 

내가 준비하고 있던 박사 학위 논문 주제는 뇌파와 fMRI 데이터를 통해 중년의 남녀가 10~20년 후에 치매에 걸릴 확률을 예측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일이었다. 미국신경과학회에서 내가 만든 시스템의 원리와 성능을 발표하고 나자, 미국 존스홉킨스 의대의 신경과 교수가 내게 질문을 했다. “아직 치매 치료제나 백신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치매 발병 가능성을 미리 알아서 얻게 되는 득은 무엇인가요? 환자에겐 그 순간부터 지옥 같은 시간이 시작될 텐데.”

깨달음은 문득 찾아드는 것.

       인간 문명사의 묘한 비틀거림이란.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들의 좌절과 뜻밖의 세속적 성공을 맞닥뜨린 소수의 사람들.

       고작 이천 년.

       세렝게티의 어린 누는 평생 사자와 하이에나를 피해 불안에 떠는 삶이 제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기는 할까.

       지구 유일의 문명을 일군 인간의 삶은 자연을 사는 동물들과는, 과연 얼마나 다른 것인지.

 

 

[2]

 

사진 기술이 발명되면서 가장 먼저 등장한 장르 중의 하나는 바로 ‘초상 사진’이었다. 왕실과 영주들에게 억압과 착취만 당했던, 그때까지 자신의 초상화를 갖지 못했던 소시민들에게 카메라를 이용해 ‘초상화’를 선사하게 된 것은 사진 기술의 문화사적 의미이기도 하다.

초상화를 대체 어디에 쓰려고?

       영문도 모른 채 타자의 욕망을 살다간 슬픈 미개들.

 

 

[3]

 

기술적으로 휴대전화 안에 디지털 카메라가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던 이유는 고화소의 CCD 카메라 모듈과 대물렌즈의 사이즈를 줄이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요가 있으면 과학기술자들은 밤을 새우도록 강요받는 법이다. 그들이 밤을 세우면, 스티븐 킹의 소설 제목처럼 ‘결국 모든 일은 벌어진다’.

그리 만들어진 부는 결국 누구의 몫으로 돌아갔을까.

 

 

[4]

 

우리에게 웃음은 유머에 대한 생리적 반응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해주는 사회적 신호다. 친하거나 호감이 가는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즐거워 웃는 것이지, 농담을 주고받아야만 웃음이 터지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나이를 먹고서도, 웃고 싶을 때 웃고 웃기 싫을 때 웃지 않을 수 있다면, 꽤나 그럴듯한 삶을 산 것.

 

 

[5]

 

9시 뉴스가 메인 뉴스가 된 가장 그럴듯한 근거는 ‘직장인의 일주기 생활 패턴 가설’이다. 텔레비전 뉴스를 주로 보는 시청자층인 중장년의 남자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해서 집에 와 씻고 텔레비전 앞에 앉기까지 가장 빈도수가 높은 시간대가 밤 9시라는 주장이다. 일찍 퇴근하는 문화가 정착된 미국이나 영국은 메인 뉴스를 오후 6시에 하는 걸 보면, 우리나라 직장인을 고려한 시간 배치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진다. 그것이 일 때문이든, 술 때문이든.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면, 퇴근해서 한 숨 돌리고 TV를 켜는 시간이 저녁 9시가 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훨씬 이르거나, 아예 늦거나.

 

 

[6]

 

잘 갖추어진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보다 장난감이 하나도 없어 장난감을 ‘만들어서’ 노는 아이들이 실제로는 창의적이다.

묘한 부사어.

       ‘실제로는’이라니? ‘더’를 쓰거나 부사어를 빼거나. ‘알고 보니’의 뜻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거나 부적절.

 

 

[7]

 

색은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힘이다. 색은 키보드이고, 눈은 망치이며, 영혼은 끈이 달린 피아노다. 예술가는 손으로 하나의 키 또는 다른 키를 두들겨서 영혼이 떨리게 만든다.

화자는 칸딘스키.

       흥미로운 비유이기는 하나,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힘’이라는 표현에 좀 더 부합하는 쪽은 ‘색’이 아니라 ‘냄새’. 후각은 오감 가운데 유일하게,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와 정서를 관장하는 편도체에 연결되는 감각을, 대뇌 신피질을 거치지 않고, 직접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냄새는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힘이다. 냄새는 키보드이고, 코는 망치이며, 영혼은 끈이 달린 피아노다. 요리사는 손으로 하나의 키 또는 다른 키를 두들겨서 영혼이 떨리게 만든다”는 서술이 진실에 좀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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