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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370.교육학

370 [권대원] 그 많은 똑똑한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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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프레임, 2015.06.15 초판 1쇄.

 

 

[1]

 

(p.34) 김대중 대통령은 교육부의 명칭을 교육인적자원개발부로 개칭함으로써 인간자본론이 자신의 교육관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그동안 익숙해진 교육부 이름을 차마 지울 수 없어 앞에 ‘교육’을 붙이고, 인간자본이라는 용어가 가져올 거부감 때문에 '인적자원'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뿐, 이 부처의 실체가 결국 인간자본개발부임은 의미상 분명해 보인다. 교육을 담당하는 국가 부처의 이름이 이렇게 인간자본론의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다.

완벽한 개인을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누군가는 인적자원개발부의 필요성에 동의하겠으나, 명백한 사달. 개인보다 공동체를 과하게 앞세우다 보면 이런 사고를 친다. 하기사 그런 품성이니 정치를 업으로 삼았겠으나. 정치인입네 하면서도 견리사의가 뭔지도 모르는 족속들보다야 그나마 낫다.

 

 

[2]

 

(p.36) 노동력의 성격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화한다. 실제로 학생들의 스펙이 높아지는 것과 별개로 기업에서는 “인재가 없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학생의 학업성취도와 기업이 요구하는 능력 간의 괴리는 노동 시장에서 계속 문제가 되었다. 바로 여기에 PISA가 등장한 배경이 있다. 경제기구로서 OECD는 세계의 기업인들로부터 학생이 교육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기업이 필요로 하는 역량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불만을 수합한 것이다. OECD는 각 나라의 공교육이 현재 그리고 미래에 필요한 역량을 길러주는 데 성공하고 있는지 평가하고 비교 분석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까지 실시돼온 각종 학업성취도평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배웠는지’를 평가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었다. 따라서 새로운 평가 프로그램이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PISA였던 것이다. 요컨대 PISA는 교육의 관점에서 학력이 아니라, 경제의 관점에서 역량을 평가하는 것이다.

지금 세대는 먹고 사는 문제에 목숨을 건다. 먹고 사는 문제가 교육을 흔들면 탈이 난다는 거야 두말할 나위가 없는데, 교육더러 먹고 사는 문제에서 손을 떼라는 것도 이상하기는 하다. 결국 교육을 통해 먹고 살게 되는 주체가 어느 쪽인지의 문제인지도. 영문 모를 여덟 살에 피교육자의 신분에 편입되어 십대의 끝자락까지 세뇌의 길을 걷는 아이들이 이런 사정을 알기는 할지, 관심이나 있을지.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한 교육학 박사인 저자는 ‘학생들의 스펙’이라는 표현을 무심하게 쓴다. 내신 10등급으로 학력고사 수학 75점 만점에 7점을 받았다는 김남훈은 <싸우는 사람들>에 ‘기계한테 쓰는 말인 스펙을 사람에게 서슴없이 쓰는 유일한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라 썼다. 낱말의 용법이야 세월이 흐르면서 변하기는 한다 쳐도, 해당 분야 전문가라면 낱말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은 달라야 하지 않겠나.

 

 

[3]

 

(p.30) OECD 국가들 대부분이 15세까지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15세가 되었다는 것, 즉 중학교를 졸업한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의무교육을 마쳤다는 뜻이다. PISA는 15세까지를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교육, 그 이후는 학생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 심지어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않는 선택지까지도 자유롭게 택할 수 있는 - 교육으로 보고 있다. 우리의 생각으로 고등학생은 당연히 학생이자 청소년인 것 같지만 PISA는 15세에 이르면 성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고등학교는 보편교육, 공교육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가 되면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가 아니라 직업이냐 학교냐를 선택할 수 있는 ‘젊은 성인’이며, 이미 세상에서의 도전에 맞설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청소년이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또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취급하는 방식이 초등학교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이들이 성인이라는 생각이 어색하지만, 경제학에서는 15세라는 나이를 경계로 성인을 구별하는 방식이 낯설지 않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15세 이상 인구를 기준으로 실업률을 계산하기 때문이다.
       의무교육이라는 말에는 교육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반영되어 있다. 대부분의 나라가 15세까지만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국가 입장에서 이 나이까지의 교육이면 국가가 할 일은 다했다고 여기기 때문이지 돈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p.37) 15세는 경제학에서 ‘경제활동 인구’의 출발점으로 분류하는 연령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아동 노동 금지, 아동 노동 제한에 해당되지 않는 연령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추가적인 학업을 선택하며, 15세부터 바로 창업이나 취업에 들어서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지만 15세 이후부터는 학업 역시 각자 생각하는 진로를 위해 선택하는 일종의 투자다.

내 주위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 우리나라는 교육기본법 제8조에 “의무교육은 6년의 초등교육과 3년의 중등교육으로 한다”고 정하고 있다. 사회가 ‘15세’에 부여하고 있는 이러한 의미는 누구보다도 15세가 되는 청소년들이 가장 잘 알아야 한다.

 

 

[4]

 

(p.46) 우리나라에서 기형적으로 받아들여져 1990년대부터 갑자기 유행처럼 퍼진 ‘자기주도 학습’은 학생이 스스로 문제집 풀고, 교과서 정리하는 그런 공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낯선 것, 익숙하지 않은 것을 마주쳤을 때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주도 학습’은 대학입시에 나름의 성취를 이루기 위한 방법론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기라는 이야기. 그런 점에서 ‘자기주도 학습’은 공부의 수단이라기보다 학창시절 동안 익혀야 할 목표에 가깝다.

 

 

[5]

 

(p.47) 근대 공교육은 소수 엘리트를 제외한 나머지를 다 같은 노동자로 길러내는 교육이었다. 공교육은 사실상 표준화된 노동자들을 대량생산하는 근대 산업사회의 공장이나 다름없었으며, 학생은 물론 교사들마저 주어진 지침에 철저히 따라야 했다. 교육과정에 따라 교과서대로 가르쳐야 했던 것이다. 배움과 가르침의 결과는 시험으로 확인되었다. 시험 역시도 사실상 학생들에게 주어진 지식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 되라는 강력한 압박이었다.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 같은 교육으로는 미래에 대비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감돌았고, 각국은 1990년대 초반부터 저마다 교육 개혁에 착수했다.

2017년의 대통령 선거에는 ‘4차산업’이라는 단어가 빈번히 오르내린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말은 식상할 정도인데, 정작 현실은 그 모양 그대로.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됐다는 교육 개혁은 껍데기만 줄창 바꾸고 앉았다. 이러다 개구리가 삶겨 죽었다던가.

 

 

[6]

 

(p.52) 우리나라는 항상 평가를 한다고 하면 평가에 필요한 것만 공부하면 된다는, 즉 시험에 나올 것만 공부하면 된다는 편향을 보여왔다.

안 그러는 게 더 이상하다. 공부를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평가를 염두에 두고 효율적, 효과적으로 공부하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나.

       문제는 가르치는 쪽에서 찾아야 한다. 교육이 변별에 불과하다는 게 대단한 비밀도 아닌 마당에, 교육이라는 것이 중요한 분야라면, 하루 빨리 변별용 교육에서 해당 분야를 덜어내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마땅.

 

 

[7]

 

(p.62) ‘literacy’를 예전에는 문해력이라고 번역했지만 그럴 경우 읽고 쓸 줄 아는 능력, 즉 문자 해독 능력과 혼동되기 때문에 학습 능력, 혹은 학습 소양이라고 옮기는 것이 원래의 의미에 더 가깝다.

literacy라는 외국어를 어떻게 번역할지의 문제가 아니다. 중차대한 것은 literacy라는 능력의 시대적 의미.

 

 

[8]

 

(p.62) 다가오는 시대는 사람들이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서로 공유하는 가운데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세상의 변화에 적응한다는 것은 학교를 졸업해서 그저 배운 것을 써먹으면서 일하면 충분했던 과거와는 다르다. 교육을 마쳤다는 것은 어떤 것들을 알고 익혔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마주치게 될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뜻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평생학습’이다.

학교란 대관절 뭘 하는 곳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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