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2015.4.4 초판 1쇄. 2015.4.22 초판 2쇄.
[1]
나는 ‘대안이 뭔데 없어? 그 말은 나도 한다’는 식으로 ‘비판적 사고’ 자체의 가치를 조롱하는 프레임을 극도로 혐오한다. 지금 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대안일 뿐, 무슨 이야기를 더 해달라는 말인가?
앞은 옳고, 뒤는 그르다. 비판은 쉽고 대안은 어렵다. ‘지금처럼 하지 않는 것’이 대안인 척하는 것은 치졸한 처사. 대안이 마땅찮으면 비판조차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비판은 정확히 하고 대안은 잘 모르겠다고 하는 게 바른 자세다. ‘지금처럼 안 하는 게 대안’이라고 둘러댈 게 아니라.
[2]
대학은 ‘신입사원이 보고서 하나 제대로 못 쓴다. 대학에서 뭘 배운 거냐!’라는 기업의 항의가 많다면서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자고 강조한다. 대학에서 왜 보고서 작성법을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세상은 그걸 아는 사람을 ‘인재’라고 부른다.
대학과 기업을 대척점에 두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주체가 하나 빠졌다. 다름 아닌 ‘학생’. 학생이 대학에 무엇을 기대하는지 고려에 넣어야 한다. 대학이야 나라마다 있지만 그 대학들의 존재 이유가 동일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나라 대학은 분명 입시에서의 경쟁우위 확보를 핵심가치로 내세우는 존재다. 밥벌이는 기업에 기대서 하는 마당에 기업의 간섭을 불편해 하는 것은 그리 정당한 태도가 못 된다. 입시와 무관한 대학이라 천명한 후에 저자처럼 말한다면 인정. 하지만 박사라는 자격으로 보따리 장사로 연명해 온 저자가 입시에 별 경쟁력 없는 지방대가 처한 냉혹한 현실을 모를 리야 없고.
그런 점에서 다음 문장을 ‘문제점’인 듯 서술한 것은 책임 없는 권리를 바라는 저자의 투정, 변명, 책임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기업은 저자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사색, 혹은 사색하는 능력에, 우호적이다. 다만 훨씬 실전적일 뿐.
사색의 실종은 구조적이다. 하나는, 사색을 근본으로 하는 학문이 ‘취업에 필요 없다’는 이유로 사라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취업에 필요한’ 강좌가 우선적으로 개설되어 강좌의 다양성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3]
카이스트 최광무 교수는 ‘현재의 영어수업은 수학 시간에 영어를 공부하는 형편이어서 전공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도 못하고 영어 실력을 제대로 키워주지도 못한다’면서 이를 비판했다. 대학의 영어수업은 ‘오해와 시간낭비의 악순환’이다.
영어 수업은 확실히 과하다. 원서 수업 역시 일정 부분 마찬가지. 번역서에 대한 시장 수요가 작은 전공선택도 아닌, 개론 과목들을 원서로 가르치는 교수들은, 언어의 장벽 때문에 그 과목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정신적 폭력을 휘두른 책임이 분명히 있다.
교수라는 직업도 밥벌이의 일환인 마당에 질 좋은 번역서를 만드는 것보다 영어 논문을 써서 세계적인 저널에 싣는 게 훨씬 남는 장사인 구조도 한몫한 결과다. (젊은 교수들이야 그렇다 쳐도, 평가에서 자유로운 정교수들은 왜 안 하는 거지?) 일본의 근대화가 탄탄한 번역 인프라에 터잡았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4]
하나의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해주는 토대가 마련되면, 배우는 사람은 스스로 사색에 잠길 수밖에 없다.
직장인들은 회의 중에 ‘정답은 없으니까’라는 말을 뜻밖에 자주 사용한다. 다만 ‘여러 가지의 정답들’에 대한 열린 자세라기보다는 ‘골치 아픈 논의는 접고, 적당히 결정하고 끝내자’는 의미로.
[5]
성적 우수자가 말하는 높은 학점을 받는 비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점수를 잘 주는 과목’을 고르는 것이다. 어떤 강의를 감명 깊게 들었다 해도 C학점을 받으면 그 사람까지 C로 평가해버리는 세상을 생각하면, 나름 적절한 자기방어다.
현재의 구조에서는 이 나라 ‘사색’을 책임질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서울대학교 역시 사정은 전혀 다르지 않은 모양. 그 현실에 대해서는 이혜정이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라는 제목으로 두툼한 책을 썼다.
[6]
2000년대 이후 컴퓨터와 빔 프로젝터 그리고 파워포인트가 가장 효과적인 교수법의 조건이 되면서 강의실은 영화관으로 변모했다. 조명을 꺼야만 학생들이 대형 스크린의 이미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칠판 전체, 강단 구석구석까지 활용할 수 있었던 교수의 움직임은 제한된다. 스크린을 가리기 때문이다. 부연설명을 할 공간이 부족하니 강의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톡톡 튀면서’ 논의가 확장될 가능성도 사라진다. 교재를 파워포인트로 옮겨 ‘낭독하는’ 강의가 많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글쎄. 진단이 좀 건성인 듯도 싶고. 선생들이 책에 코를 박고 책에 적힌 문장을 주욱 읽어내리던 수업에서도 사색이야 충분히 기능했으니.
[7]
어떤 주장을 이해하려면, 최소한 그 주장과 관련된 분위기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 기초는 ‘제도권 교육’에서 마련해주어야 한다. 모두가 ‘심화 단계’로 올라갈 필요는 없지만, 기초를 알면 적어도 그것의 ‘논리적 확장’인 심화 단계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이것만으로도 사회는 충분히 상식적으로 호흡할 수 있다. 하지만 기초가 없으면 당연히 ‘갑자기 마주치는 철학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입시에 매달린 초중고 교육이 내다 버린 역할들. 변별이라는 낱말이 너무 일찍 들어서는 것이 이 나라 교육의 근본적 문제.
[8]
비굴했지만, 모두가 비굴했기에 참을 만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악의 편에 서는 매커니즘이 아마도 이것.
[9]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대학평가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US News and World Report가 1984년부터 실시했다. 이는 1980년대의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의 한 과정이었다. 미국의 대학은 68운동 이후 과거에 비해 굉장히 좌파적으로 변했는데 정부로서는 이 눈엣가시를 정리할 수단이 바로 대학평가였다. 쉽게 말해, 대학평가는 반자본주의 운동의 온상이었던 대학을 온순한 양들로 길들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의 빗장이 열리기 시작하던 1994년에 중앙일보 대학평가가 시작된 것도 이런 궤적과 무관하지 않다.
모든 평가에는 ‘어떤 목표 어떤 잣대로 평가했는가’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10]
초식동물인 소는 원래 근내 지방(마블링)이 생기지 않는다. 소의 지방은 근육 ‘사이’에 낄 뿐이다. 그런데 소가 풀이 아니라 ‘옥수수 사료’를 먹기 시작하면서 지방이 팽창하여 근육 사이를 파고든다. 과거 미국은 남아도는 옥수수 사료를 처리하기 위해 소에게 먹였고, 곡물업자들로부터 막대한 로비를 받은 미국 농무부는 ‘마블링’ 등급제를 실시했다. 등급제 전에는 ‘기름 많은 소고기'였던 것이 등급제 후에는 ‘좋은 소고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풀 먹인 소’의 고기는 낮은 등급을 받았다. 이제 시장에서는 ‘마블링이 많은 소고기’에 대한 수요가 절대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곡물 사료를 먹이고, 덩치를 키우기 위해 최대한 좁은 공간에 가두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소가 아프다. 그 소고기를 먹은 사람도 당연히 아프다. 그럼에도 그 소는 ‘등급’이 높기에 좋은 소다. 게다가 ‘미국 소에 질 수 없다’는 한국인의 괴상한 의지는 미국에서 최고급이 ‘프라임’ 판정을 받은 소고기는 감히 넘보지도 못할 1+급을 만들더니, 심지어 어떻게 읽어야 할지도 모를 1++급까지 탄생시킨다. (참고로 미국 사람들도 잘 안 먹는다는 ‘프라임’은 한국에서는 1, 2등급 사이다.) 더 많은 옥수수 사료를 먹이고 더 많은 항생제 주사를 맞은 소지만, ‘청정한우’ ‘명품한우’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높은 가격에 팔린다. 정육점에 가서 2등급이나 3등급 소를 찾으면 ‘우리 가게엔 그런 질 낮은 고기 없습니다!’라고 한다.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등급’으로 포장되면 속수무책이다. 마블링의 사례는 들어가지 말아야 할 영역에까지 자본이 들어갈 경우, 얼마나 많은 기이한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소도 평가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마블링’으로 평가할 이유는 없다. 한국의 대학도 평가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평가기준을 선정하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
뜻밖의 토막상식.
[11]
‘왜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상대평가에서 여러 어려움을 야기한다. 그래서 ‘다음 나라들 중 실질적으로 사형제가 폐지된 나라는?’이라는 객관식 문제만 출제될 뿐이다. 평가가 이러하니 사형제에 대해 더 깊게 공부할 필요가 없다.
변별이 전제된 공부의 한계. 대학이 변별의 역할을 맡는 한 별 도리가 없는 거야 자명한 사실.
[12]
한국사회는 ‘비판적인 것을 공격적인 것으로, 창의적인 것을 엉뚱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무척 강하다. 이는 결국 기존의 고정관념을 확대재생산한다.
반만년 단일민족이 자랑인 나라의 한계. 다름에 대한 본능적 반감과 불안을 가진 사회. 남부럽다나 남부끄럽다 같은 낱말을 가진 소심한 사회.
[13]
‘부수적 피해는 감수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다. 그러나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는 군사용어다. 예를 들어, 무인조종기의 오인폭격으로 민간인이 죽거나 다치면 그것이 바로 부수적 피해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부수적 피해를 사회적 불평등을 전제하면서 이를 감추고 기만하는 개념이라 정의한다.
감수를 강조하려면 collateral damage, 흠집이나 책임회피에는 side-effect.
[14]
작업은 지지부진했다. 증거는 무수했지만 그것들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 때문이었다.
어떤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공유하기 직전에 만나는 감정.
[15]
부제는 ‘기업의 노예가 된 한국 대학의 자화상’. 적어도 한 세대 정도는, 이 사회에 별 희망이 없다. 구성원들이 작정하고 만든 결과니, 뭐랄 것도 없다.
분야는 교육학. 국립도서관에서도 377번 딱지를 붙였다. 그러나 책을 분류한 사서가 “교육학”의 범위를 과하게 넓게 잡았다. 대학 교육을 어찌해 보자기보다는 자본에 휘둘리는 사회 문제를 드러내려 한다는 점에서 “사회학” 책장에 어울리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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