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람들. 2019.1.22 초판 1쇄. 2019.2.22 초판 2쇄.
[1]
제목이 말하듯 사전의 형식을 빌린 책. 가나다 순서에 따라 첫머리를 장식한 표제어는 ‘가분수’.
저자의 가분수 뜻풀이는 이렇게 시작된다:
(p.14) 분자가 분모보다 더 큰 분수가 가분수다.
미안하지만 틀린 설명. 주격조사를 달리 해서 ‘분자가 분모보다 더 큰 분수는 가분수다’라고 고쳐 쓰면 어떻든 오류는 피할 수 있다. 다만 사전의 뜻풀이로는 실격.
애매한 풀이를 늘어놓느니 ‘가분수는 분자가 분모보다 더 큰 분수’라고 써서, 화끈하게 틀리는 쪽이 차라리 나았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대개 전문용어의 뜻풀이가 도통 신통찮은데, 표제어 ‘가분수’만큼은 저자보다 한결 정확한 뜻풀이를 담았다:
가분수 (假分水) 명사. [수학] 분자가 분모와 같거나 분모보다 큰 분수.
저자의 뜻풀이는 한마디로 충분조건. 사전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려면 필요충분적 서술을 하는 게 옳다.
하필 첫 문장부터 신통찮아서, 읽을 마음이 싹 가신다.
[2]
(p.54) 기하학은 지오메트리를 번역한 중국말이다. 17세기 명나라의 서광계는 서양 수학의 대표적인 책인 <기하학원론>을 번역했다. 이때 기하학이란 말도 만들어졌다. 그는 지오geo의 발음과 비슷하면서도 다루는 내용과 관련된 말을 선택했는데, 그것이 기하였다.
그는 말을 새로 만들기보다 예전에 써 오던 말 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기하는 중국의 수학책인 <구장산술>에 자주 등장하는 말로, 뜻은 ‘얼마인가?’였다. 이 말은 수학 문제의 말미에 사용되어 답이 얼마인지를 물었다.
양주동이 들으면 적잖이 서운할 듯. ‘기하’라는 낱말은 저자 말마따나 ‘얼마인가’라고 쉽게 풀이 되는 한자어가 아니다.
한문학이라면 무불통지를 자처하던 양주동조차 <문주반생기>에 幾何의 기괴함에 깊이 고심했던 회억을 담았다.
(p.65) 중학교에 입학하여 시업 전날에 교과서를 샀는데, <물리>니 <화학>이니 <동양사>니 하는 책들은 우선 제호부터 친숙했으나, 모를 것은 <기하학 교과서>라는 책의 ‘기하’란 새 말이다. 이 말은 실로 내게는 “연사피리순”, “처녀작”, “3인칭” 뒤에 네 번째로 나타나는 기괴한 단어였다. 밤새도록 책 표지를 응시하다가 다음날 ‘기하’ 시간에 나는 강의를 시작하려는 선생을 제지하고 문득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발하였다.- 양주동, <문주반생기>
연사피리순은 inspiration의 독음. 양주동에게 연사피리순은 ‘양계초의 <음빙실 문집>에서 경이로서 맨 처음 배웠던 영길리어’. 양계초는 inspiration을 ‘천래의 영력’이라 풀이한 모양인데, 요즘 사전들이 흔히 내세우는 ‘영감’에 비하면 나름 인상적.
[3]
외세 앞에 무력했던 역사만큼이나 이 나라 전문용어의 실상은 한심하기 그지없다. 해를 굳이 태양이라 하고, 씨를 굳이 종자라 한다. ‘해’를 ‘태양을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일컫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이 땅의 전문가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단적으로 보여 준다.
전문용어일수록, 여건이 허락하는 한, 순우리말을 쓰는 게 옳다. 그래야 그 분야에 우리 생각, 우리 기술이 자랄 수 있을 것인데, 다만, 전문용어를 순우리말로 다듬는 일은 씨나 씨앗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하는 어리숙함으로는, 단언컨대, 이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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