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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420.물리학

420 [이종필]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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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 2018.4.12 초판 1쇄.

 

 

[1]

 

(p.44) $F=ma$로 정의되는 질량을 관성질량, $F=- {{GMm} \over {r^2}}$으로 정의되는 질량을 중력질량이라 부른다. 관성질량은 물체에 힘을 주었을 때 속도의 변화를 거부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양이다. 외부에서 가한 힘이 일정할 때 질량이 클수록 가속도, 즉 속도의 변화가 작다. 그러니까 물체에 힘을 줘서 그 물체의 속도가 얼마나 쉽게 변하는가를 측정하면 그 물체의 질량을 잴 수 있다. 한편 중력질량은 질량이 있는 물체가 다른 물체를 얼마나 큰 힘으로 당기는가로 정해지는 질량이다. 보통의 저울은 지구가 물체를 얼마나 세게 당기는가를 측정하는 기구이다. 이렇게 측정하는 질량이 중력질량이다.
       우리가 사는 우주에서는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이 같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두 질량이 왜 같은지는 아직 근본적인 수준에서 알지 못한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중력이론인 일반상대성이론을 개발할 때 관성질량과 중력질량 사이의 이 성질(보다 넓은 의미에서 등가원리라 한다.)을 가장 중요한 모티브로 삼았다.

보일듯이 보일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따옥 따옥소리 처량한 소리마냥 물리학의 세계는 좀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애써 읽어 어렴풋이나마 알 듯 싶다가도 여지없이 혼란에 빠진다. 뉴턴의 생각을 좀 이해했나 싶었더니 물리학과 교수라는 양반이 “지금까지 배운 물리학은 모두 잊어라. 올바른 물리학은 양자역학뿐이다.” 같은 소리를 태평하게 늘어놓는다. 양자역학이 뭔데요 했더니, 그 방면의 대가가 “양자역학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안전하게 말할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단다.

       이쯤 되면 아는 게 뭐고 모르는 게 뭔지 분간키도 쉽잖다. 사실인가 했더니 가설이고, 비유인가 싶었더니 팩트란다. 그런 줄만 알았는데 아니었고, 아닌 줄 알았는데 옳더란다. 새똥을 치우다가 우주의 실체를 알아냈다더니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단다.

       정신없는 혼란에서 한 걸음 물러서면 이 모든 것이 백 년의 소동.

 

 

[2]

 

(p.78) 가속운동을 하지 않으면 관성의 법칙이 성립한다. 급정거하는 버스 안에서는 관성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정지해 있던 물체는 갑자기 앞으로 튕겨 나간다. 이는 버스의 속도가 갑자기 변해 버스 뒷방향으로 가속도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버스 앞쪽으로 힘이 작용한다. 이 힘을 관성력이라고 한다. 관성력은 가속도의 반대 방향으로 작용한다.

누군가는 이런 설명을 어렵잖게 납득한다. 나는 그런 깜은 못 된다. 난해의 원인을 곱씹어 보니 짐작컨대 가속도의 방향. 밀고 당기는 힘에 방향을 따지는 거야 직관의 영역이겠으나 속도의 변화라는 물리량에 방향을 덧댈 머리가 못되는 까닭이다. 힘과 가속도가 벡터인 줄은 십수년 전에 알았으면서도 정작 가속도의 방향을 의식한 적은 없다는 소리.

 

 

[3]

 

(p.82) 광속은 그 어떤 상대적인 운동에 대해서도 광원의 속력이나 관찰자의 속력이 더해지거나 빼지지 않는다. 광속은 상대적인 운동과 상관없이 항상 광속이다. 이것이 광속불변 가정이다.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널 때를 생각해 보자. 바로 옆의 도로에서 자동차가 지하철과 똑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으면 우리는 자동차가 지하철에 대해 정지해 있는 것으로 관찰한다. 지하철과 자동차가 모두 빛이라면 어떻게 될까? 즉, 광속으로 날아가면서 옆에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는 빛을 보면 어떻게 될까? 지하철과 자동차의 경우처럼 빛이 정지해 있을까?

이 대목에 중학교 과학 교과서를 덧대면 색다른 맛이 난다.

 

햇빛을 물체에 비추면, 물체는 일부 색의 빛을 흡수하고 나머지 색의 빛을 반사한다. 이때 물체에 반사되어 나온 빛의 색을 통해 우리는 그 물체의 색을 인식한다. 만약 물체에 반사되어 나온 빛이 없다면, 우리는 그 물체를 검은색으로 인식한다.

- 김호련 외, <중학교 과학 1>

옆에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는 빛이 보인다는 것은 어떻든 그 ‘물체’를 비춘 빛이 반사되어 내 눈에 도달했다는 말이다. 광속으로 달리는 그 ‘물체’와 광속으로 날아가는 나를 따라잡아서.

       광속으로 움직이는 물체와 그 옆을 광속으로 날아가는 나와 물체 사이를 광속으로 헤집고 다니는 그 어떤 빛.

 

 

[4]

 

(p.89) 인간에게 익숙하고 편리한 개념이 꼭 우주의 본질을 담고 있을 이유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종교시대 지성의 한계. 아리스토텔레스는 과거로 물러났으나 종교는 여전히 떼를 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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