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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부 이의방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새로운 왕을 옹립하였어요. 최충헌 도방을 더 큰 규모로 재건하고, 교정도감을 설치하였어요. 최우 정방을 통해 인사권을 장악하였고,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였어요.
- 25학년도 수능
이의방과 이고가 정중부를 따라가 몰래 말하기를,
"오늘날 문신들은 득의양양하여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음식을 배불리 먹는데,
무신들은 모두 굶주리고 고달프니 이것을 어찌 참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하였다.
- 한능검 심화 59회
어가가 보현원 근처에 이르렀을 때
이고와 이의방이 앞질러 가서 왕의 명령을 위조하여 순검군을 모았다.
왕이 문에 막 들어가고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려는데
이고 등이 임종식, 이복기, 한뢰를 죽였으며,
왕을 모시던 문관 및 대소 신료, 환관들도 살해하였다.
- 한능검 심화 79회
1170년(의종 24년)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은 보현원에서 문신들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의방은 평소 자기를 핍박하는 이고를 미워하였는데,
이고가 난을 모의한다는 말을 듣고 1171년(명종 1년) 그를 살해하였다.
- 한능검 심화 71회
김보당이 정중부, 이의방을 토벌하고 의종을 다시 세우고자
동북면지병마사 한언국과 군사를 일으켜 함께 하도록 했다.
정중부, 이의방이 이 소식을 듣고
장군 이의민, 산원 박존위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남로로 가도록 했고,
또 군사를 서해도로 파견하여 대응하도록 했다.
- 한능검 심화 74회
문신인 김보당은 정중부와 이의방 등 무신 세력을 몰아내고
폐위된 의종을 복위시키고자 1173년(명종 3년) 김보당의 난을 일으켰다.
1174년(명종 4년) 서경유수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반발하여 정중부와 이의방을 치고자 반란을 일으켰는데,
두경승이 향산동 통로역에서 반란군을 패퇴시켰다.
- 한능검 심화 71회
무신정변 이후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지방 수탈과 횡포가 심해지자
1176년(명종 6년) 이에 반발하여 충청도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와 망소이 형제가 주도하여 난을 일으켰다.
1179년 정중부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경대승이 1183년 30세의 나이로 돌연 사망한 뒤
이의민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이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는 일이 발생하였다.
최충수가 화가 나서 형인 최충헌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이의민 부자를 죽이자고 하니, 최충헌이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마침 왕이 보제사에 행차하였는데,
이의민이 병을 핑계로 호위하지 않고 몰래 미타산의 별장으로 갔다.
이에 최충헌 등이 가서 이의민을 제거하였다.
- 26년 6월 고1 학력평가
이의민은 1196년 5월 미타산에서 최충헌 형제에게 피살당하였다.
최충헌은 최충수와 함께 봉사를 올렸다.
"낡은 제도를 혁파하고 새로운 정치를 도모하심에
오로지 태조의 올바른 법을 따르시어 중흥의 길을 환히 여시길 바랍니다.
삼가 열 가지 사항을 아뢰옵니다."
- 한능검 심화 74회
1196년(명종 26년)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최충헌은
정권 장악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10개 조의 정치 개혁안인 봉사십조를 올렸다.
만적 등 6명이 북산에서 땔나무를 하다가,
공사의 노복들을 불러 모아 모의하며 말하기를,
"국가에서 경인년과 계사년 이래로 높은 관직도 천예에서 많이 나왔으니,
장상에 어찌 씨가 있겠는가?
때가 되면 누구나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라고 어찌 뼈 빠지게 일만 하면서 채찍 아래에서 고통만 당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여러 노들이 모두 그렇다고 하였다.
가노 순정이 한충유에게 변란을 고하자 한충유가 최충헌에게 알렸다.
마침내 만적 등 100여 명을 체포하여 강에 던졌다.
- 한능검 심화 51회
노비 만적 등 6인이 개경의 북산에서 나무하다가
공노비와 사노비를 불러 모의하기를,
"정중부의 반란과 김보당의 반란 이후로 고관이 천민과 노비에서 많이 나왔다.
장상의 씨가 따로 있으랴!"
라고 하였다.
- 25년 국가직 9급
신종 원년 사노비 만적 등이 북산에서 땔나무를 하다가 공사의 노비들을 모아 모의하기를,
"우리가 성 안에서 봉기하여 먼저 최충헌 등을 죽인다.
이어서 각각 자신의 주인을 죽이고 천적을 불태워 삼한에서 천민을 없게 하자.
그러면 공경장상이라도 우리가 모두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 20년 국가직 9급
1198년(신종 1년) 노비 신분인 만적이 신분 해방을 주장하며 난을 일으켰다.
강화 석릉은 고려 희종의 무덤이다.
이의민을 제거하고 집권한 최충헌이 스스로 교정별감이 되어 전횡을 일삼자,
희종은 그를 암살하려고 하였으나 도방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그 결과 희종은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이후 여러 유배지를 전전하다 고종 24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 한능검 심화 77회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최충헌의 묘지명에는
최충헌이 명종의 퇴위와 신종의 즉위에 관여한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한능검 심화 67회
최우가 정방을 자기 집에 설치하고 문사를 선발하여 여기에 소속시켰다.
- 한능검 심화 71회
고종 12년(1225년)에 최우가 자신의 집에 정방을 두고 백관의 인사를 다루었는데
문사를 뽑아 이에 속하게 하고 필자적이라 불렀다. - 고려사
- 26년 국회직 9급, 23년 서울시 9급
백관이 최우의 집에 나아가 정년도목을 올리니,
최우가 청사에 앉아 받았다.
6품 이하는 당하에서 두 번 절하고 땅에 엎드려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최우는 정방을 자기 집에 두고 백관의 인사 행정을 처리하였다. - 고려사절요
- 한능검 심화 60회
처음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은 것을 염려하여
용사를 모아 매일 밤 순행하여 폭행을 막게 하였다.
그 까닭으로 야별초라 불렀다.
도적이 여러 도시에서 일어났으므로 별초를 나누어 파견하여 잡게 하였다.
그 군대의 수가 많아져 드디어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었다.
또, 몽골에 갔다가 도망해 온 고려인으로 한 부대를 만들어 신의군이라 불렀다.
- 한능검 2급 2회
최우가 녹전거 100여 대를 빼앗아 집안의 재물을 강화도로 옮기니,
수도가 흉흉하였다.
또 사자를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백성을 산성과 섬으로 옮겼다.
- 한능검 심화 70회
송악산 옛 자취 허황한 꿈이거니,
황폐해진 그 땅일랑 다시 생각 마오.
그대여 바라보라, 저 새 도읍의 화산을
그 중간에 궁전 열어 천자를 받드노라.
천 개의 집 여기저기 푸른 기와 즐비하고
만 개의 부엌 아침저녁 푸른 연기 나네.
[해설] 이 작품은 이규보가 지은 시 중 일부이다.
몽골군의 침략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
이어진 전쟁으로 황폐해진 옛 수도 개경과 대비되는 번성한 강화를 표현하였다.
이를 통해 피폐한 본토의 모습과 동떨어진 지배층의 안락한 삶을 엿볼 수 있다.
- 26년 6월 고2 학력평가
무신정권 지도자였던 최우는 몽골의 침략에 맞서 장기간 항전하기 위해
1232년(고종 19년)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고려는 1270년(원종 11년)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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