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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가 귀국 후 흥덕왕을 알현하여,
"온 중국이 우리나라 사람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청해에 진을 설치하여 해적이 사람을 중국으로 잡아가는 것을 막으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흥덕왕이 장보고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서 지키게 하였다.

- 한능검 심화 59회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해적이 출몰하여
무역선을 약탈하거나 신라인을 잡아 노비로 파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이를 막기 위해 장보고가 군진의 설치를 건의하자
흥덕왕은 청해진을 두고 장보고를 대사로 임명하였다.

- 26년 지역인재 9급

 

아찬 우징(신무왕)은 청해진에 있으면서 김명(민애왕)이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고
청해진 대사 궁복(장보고)에게 말하였다.
"김명은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장군의 군사를 빌려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 한능검 심화 54회

 

아찬 우징(신무왕)은 김명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이의 원수를 갚고자 청해진을 관장하는 장보고에게 군사를 요청하였다.
문성왕 8년에 장보고는
문성왕이 자신의 딸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 26년 지방직 9급

 

문성왕이 청해진 대사 궁복(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고자 하였다.
조정 신하들이 간언하기를
"지금 궁복은 바다의 섬사람이거늘,
그 딸이 어찌 왕실의 배필로 적합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그 말에 따랐다.
궁복(장보고)은 문성왕이 딸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원한을 품고
청해진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


- 한능검 심화 79회

 

청해진의 궁복(장보고)은
문성왕이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장차 그를 토벌하자니 예측하지 못할 환난이 생길까 두렵고,
그대로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어서, 우려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무주 사람 염장이란 자는 용맹하고 씩씩하기로 당시에 소문이 났는데, 와서 아뢰기를
"조정에서 다행히 신의 말을 들어주신다면
신은 한 명의 병졸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맨주먹으로 궁복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문성왕이 그의 말을 따랐다.                   - 삼국사기

- 한능검 심화 64회

 

궁복은 해상왕 장보고의 본명이다.

 

장보고는 해적들이 신라 사람들을 노예로 파는 것을 보고

왕에게 청하여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만들었다.

 

838년 장보고는 김우징(신무왕)의 요청으로 군사를 내어 그가 왕위에 오르도록 도왔다.

이때 신무왕은 장보고의 딸을 차비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다.

 

신무왕이 즉위 직후 사망하자

뒤를 이은 문성왕이 이 약속을 이행하려 했다.

그러나 경주의 진골 귀족들이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845년 혼인이 무산되자

평민 출신으로 최고의 무력과 부를 쌓았으나 신분제의 한계에 부딪힌 장보고는

846년 봄 청해진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

 

신라 조정이 강력한 사병 집단인 청해진 군대를 무력으로 토벌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두려워하자

무주 출신인 염장이 조정에 죄를 짓고 쫓겨난 것으로 위장해 청해진으로 망명했다.

장보고는 염장을 받아들였고

염장은 장보고가 술에 취해 방심한 틈을 타 장보고를 암살하였다.

 

신라 조정은 세력이 급격히 와해된 청해진을 혁파하고

청해진의 주민들을 벽골군(전북 김제)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장보고의 죽음과 청해진의 해체로

신라가 장악하고 있던 동아시아 해상 교역망의 주도권이 소멸하고

바닷길에는 해적이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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